요즘 뜨고 있는 유격수가 있다. 워싱턴 내셔널스의 트레이 터너다. 외야수를 겸하고 있는 이 24살짜리는 특히 달리기 선수로 이름이 높다. 그는 작년 어느 경기에서 3루타를 치고 시속 22.7마일(36.5㎞)의 속도로 베이스를 질주했다. 2016시즌 ML 최고 기록이었다. 환산하면 100미터를 10.13초에 끊는 주력이다. 그것도 곡선 주로에서 말이다.
그의 발이 6월 27일 시카고 컵스와 홈 경기에서 또 말썽을 일으켰다. 1회 안타를 치고 나가더니 2루와 3루를 거푸 훔쳤다. 3회에도 마찬가지였다. 볼넷. 그리고는 또다시 2, 3루 연쇄 절도를 감행했다.
그의 4개가 전부가 아니다. 홈 팀은 4회까지 무려 7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다. 상대 팀은 버틸 재주가 없다. 1-6으로 완패한 뒤 쑥덕거림이 시작됐다. 따가운 눈총을 받던 포수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아니 그게 왜 다 내 잘못이야. 투수가 기회조차 주지 않는데 뭘 어쩌라구.”
클럽 하우스가 발칵 뒤집어졌다. 동료에게 책임을 떠넘긴 발언에 성토가 쏟아졌다. 팀 리더인 앤서니 리조가 들고 일어났다. “그 따위 이기적인 말은 참을 수 없다. 우리한테는 주자를 아웃시킬 다른 포수가 얼마든지 있다.”
결국 연봉 1,400만 달러나 되는 베테랑 포수는 이튿날 팀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토론토 행 비행기를 타야했다. 두 번이나 올스타에 뽑혔던 미겔 몬테로였다. 물론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당시 투수 제이크 아리에타는 유명한 도루 자판기였으니까.
1회, 초반 승부를 가른 도루 3개
1회 초, 2사 1루가 됐다. 다음은 이미 전국구 스타가 된 코디 벨린저의 차례였다. 3구째. 갑자기 1루 주자가 스타트를 끊었다. 제 정신인가? 타석에 4번 타자가 있는데, 도루라니? 그것도 보통 타자인가. 리그 홈런 선두를 넘보는 슬러거 아닌가.
물론 이해되는 측면은 있다. 일단 카운트가 (타자에게) 불리했다. 0-2였다. 혹시라도 아웃되면 다음 이닝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니, 위로는 된다. 게다가 변화구 타이밍이다. 성공 확률은 조금 높아진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뛸 타이밍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다. 뜻밖에 바깥쪽 빠른 공(92마일)이었다. 포수의 송구도 괜찮았다. 2루심 윌 리틀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세번째 아웃이 선언되며 첫 이닝이 끝났다.
순간 주자가 강력하게 반발한다. “헤이, 헤이, 헤이”. 다급한 외침이었다. 벤치를 가리키며 뭔가를 호소했다. 물론 그만큼 다급하게 헬멧도 찾아 쓰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한참을 숙고하던 원정 팀은 항소를 결정했다. “비디오 한번 봅시다.” 느린 화면을 통해 이의 신청은 성립됐다. 덕 아웃으로 철수했던 홈 팀은 다시 그라운드로 나와야 했다.
계속된 2사 1, 2루. 카운트 1-1에서 3구째. 이번에는 2명의 주자가 동시에 출발했다. 하지만 포수가 공을 던질 틈도 없었다. 너무나 여유 있게 더블 스틸이 성공했다. 마치 미겔 몬테로가 아리에타에 대한 불만을 터트릴 때와 비슷했다. “투수가 (도루 저지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데 뭘 어쩌라구.”
메츠의 투수 스티븐 매츠 역시 자판기 스타일이다. 투구 동작이 느리기로 유명하다. ML 평균 딜리버리 타임은 1.4초 정도. 그런데 그는 1.5초~1.7초대까지 올라간다. 터너가 2루를 훔칠 때는 1.58초, 더블 스틸 때는 1.7초가 넘었다. 그 정도면 자유이용권을 손목에 채워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원정 팀은 여기서 승부를 결정냈다. 포사이드가 중전안타로 2명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마저도 반스의 2루타로 홈을 밟았다. 3-0. 도루 3개가 치명적이었던 1회 초였다.
포수 반스의 손등을 강타한 파울 타구
얼마만의 득점 지원인가. 원정 팀 선발은 콧노래가 나온다. 일찌감치 점수를 뽑아주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KKKK. 1~4번까지 신나는 삼진 퍼레이드다. 빠지는 것도, 몰리는 것도 없다. 던지는 것마다 아슬아슬, 보더 라인을 타고 넘으며 타자들을 미치게 한다.
2회 2사까지 일사천리였다. 6번 호세 레예스 타석. 카운트가 2-2로 팽팽하다. 5구째, 83마일짜리 체인지업이 외곽을 통과하고 있었다. 헛스윙으로 또 하나의 K가 완성되려는 순간. 레예스가 순발력을 발휘했다. 미세한 배트 컨트롤로 포수 미트에 들어가려던 공을 살짝 건드렸다. 방망이에 스친 타구는 포수의 오른손을 강타했다. ‘쩍’ 하는 소리가 현장 마이크를 타고 사방으로 중계됐다.
맨 손에, 그것도 손등 부분을 맞은 오스틴 반스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 자리에서 펄쩍 뛰더니 어쩔 줄 모른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바닥을 한참 동안 땅에 대보기도 한다. 의무 스태프가 달려나왔지만 빈손이다. 이럴 때 그들이 한국의 유명한 만병통치약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감독까지 포함해서 그들이 해줄 건 없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듯, 반스는 다시 마스크를 썼다.
반스는 왜 오른손을 그렇게 내밀고 있었나
여기서 짚어야 할 부분이 있다. 오스틴 반스가 왜 공에 맞아야 했는지에 대한 얘기다.
보통이라면 포수의 오른손은 뒤에 감춰져 있다. 파울볼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실전처럼 손을 앞으로 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① 주자가 있을 때 ② 투(two) 스트라이크 이후다.
①의 경우는 송구 동작을 조금이라도 빠르게 하려는 의도다. 아무래도 뒤에 있는 것보다는 미트 바로 옆에 있는 것이 공을 빼서 던지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리라.
②는 조금 다르다. 땅에 튀기는 공을 막는 블로킹 자세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특히 떨어지는 변화구 사인을 낸 뒤에 그렇다. 3번째 스트라이크가 헛스윙→낫 아웃이 되는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다.
실전이 딱 그랬다. 카운트 2-2에서 5구째는 체인지업 사인이었다. 혹시라도 공을 빠트려 아웃 카운트 1개를 놓칠까봐 (빠른 블로킹 자세 전환을 위해) 오른손을 앞으로 내놓고 있었다.
하드보일드 투수의 격한 반응 - 파트너이기 때문에
99번 투수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다. 마운드 위에서 별 액션이나 표정 변화가 없다. 홈런을 맞아도, 삼진을 잡아도 늘 비슷하다. 담담하고, 담백하다. 군더더기, 오버액션 따위는 없는 플레이어다.
하지만 이 때만은 180도 달랐다. 반스가 고통에 절절매는 순간이었다. 99번 투수는 덕아웃을 보면서 급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글러브로 재촉하며 ‘빨리 사람 내보내라’는 손짓이었다. 아마도 생생한 소리와 함께 바로 앞에서 적나라한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에 놀람이 더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걱정스러운 얼굴로 피해자를 지켜봤다. 이어 (자기 자신은 경기 준비를 해야 하니) 워밍업을 위해 구심으로부터 공을 건네 받을 때도 몹시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역력히 드러냈다.
아마도 그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손을 뒤로 빼면 안전하다. 하지만 그러다가 만의 하나 아웃 카운트 1개를 놓칠 지 모른다. 때문에 고통과 부상의 위험이 버젓한 곳에 한쪽 손을 내어놓는다. 그런 희생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바로 마운드 위의 투수다. 그들은 바로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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