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애국 국회의원 강동원 의님 화이팅 !!
대선 부정선거 국회 본회의 에서 폭로 .......
부정선거 닭년 범죄정권 타도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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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에게강동원 의원을 사랑하는 모임(강ᆞ사ᆞ모)
유년시절부터 리더십이 남달랐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호롱불에 의지했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남달리 공부를 잘했다. 직선 어린이회장에 당선되어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수줍기 그지없는 어린이였다. 담임선생님의 통신부 기록은 “성적 우수하고 리더십 뛰어나지만, 남아다운 기백이 부족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원읍내 용성중학교로 진학해 학교 도서관에서 자취생활을 하면서 청운의 꿈을 키웠다. 3년간 학급 반장을 지냈고 직선 학생회장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넉넉지 않아 대학진학을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그래서 전주상고(현 전주일고)에 응시 장학생으로 진학했다. 1학년에 입학했지만 하숙하지 못하고 남원에서 전주까지 열차통학을 했다. 당시 열차는 증기기관차였다. 왕복 통학시간만도 보통 4시간이 걸렸다. 결국 통학 1년을 정리하고 2학년부터 하숙을 시작했다. 당시 전주남중과 전주상고는 교장선생님이 한 분이었다. 상고 학생회장을 비롯한 모든 간부들을 전주남중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직선 학생회장에 출마, 군 단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했다. 특히 그는 전주시내 남녀고등학교 학생회장단을 결성해 단장으로 활동했다. 학생회장 시절인 1970년은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국이 매우 어수선했다. 전북대 총학과 연결되어 시위를 준비하던 중 전주시내 태극당 제과점에 들이닥친 형사들에 의해 전주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결국 한강수 교장선생님의 각서와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훈육주임 임용래 선생님께 탱자나무 몽둥이로 종아리가 터지도록 매를 맞기도 했고 학교에선 교장명령에 의한 퇴학을 통보하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학교장 추천으로 영진약품에 입사했지만 3개월 만에 그만 뒀다. 상급자의 담배심부름이 부당하다며 항의하다가 결국 스스로 걸어 나왔다.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리어카도 끌어보고 과외알바도 해보고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강원도 인제군 현리 소재 제3군단사령부 인사참모부 인사서기병으로 군 생활을 마치고 1977년 병장 제대했다. 현역 시절 군단장은 박정희를 저격했던 김재규 중장, 후임은 12.12반란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중장이었다. 국회의원 당선 직후 당시 제102야전병원 간호부장 박말순 예비역 중령을 남원 운봉향우회에서 35년 만에 조우, ‘전선야곡’을 함께 불렀던 일화는 유명하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이던 1978년 12월 10대 총선에 큰형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군에서 제대를 하자마자 형의 총선준비를 했다. 큰형이 선거에서 실패하자 홀로서기를 시도하면서 생활전선에서 뛰어들었다. 그러던 중 전두환 일당이 광주시민을 잔인하게 도륙했던 1980년 봄, 박관현(5.18 당시 전남대 학생회장)의 전남도청 광장 시위현장을 지켜보면서 정치에 뜻을 굳혔다. 박관현 열사는 같은 날 군번을 받고 같은 날 전역했던 3군단사령부 전우였다. 그래서 그는 매년 5월 망월동의 박관현 열사 묘역을 소리 없이 찾아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곤 한다. 그러던 중 1981년 11대 총선에서 당선된 고향선배 이형배 의원의 비서관(입법사무관)으로 정치에 정식 입문했다. 당시 28살에 최연소 비서관으로 정치를 시작했는데 같은 또래로 부산 박종웅, 경기 광주 정진섭 전 의원이 있다. 이렇게 시작한 국회경력이 어느새 34년이 되었다. 날카로운 자료 분석과 솜씨 좋은 문장실력은 다른 국회의원들의 대정부질문서를 대필할 정도로 인정받았다. 전두환 군부세력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던 민주화의 상징 김대중 선생의 비서(민추협 공동의장)로 발탁된 것은 1986년의 일이다. 이후 김대중 선생의 본산이었던 민주인권연구회 총무, 평민당 창당준비위원, 김대중 총재 비서, 평민당 재정국장을 맡았다. 당시 야당의 촉망받는 청년인재로 부상하면서 두터운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열혈청년 강동원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섰다. 전두환 군사독재 타도와 직선제쟁취 가투로 매일 최루탄을 뒤집어썼다. 수십 차례 닭장차에 실려 난지도와 충남의 들판에 내팽개쳐졌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때는 집시법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87년 6·10항쟁 당시 독재정권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김대중 선생이 사면 복권되었다. 이 때 양김(DJ, YS)의 후보단일화가 어렵게 되자 김대중 선생의 밀명을 받아 안기부와 경찰 등 정보기관원의 미행을 따돌리고 공덕동 로타리 제일빌딩에서 3일 만에 여의도 잠입에 성공, 대하빌딩 9층을 위장 계약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그 인연으로 대하빌딩 주인 김영도 사장은 13대에 전국구 의원이 된다. 그래서 오늘날 대하빌딩은 정치1번지라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눈물겨운 일화는 끝이 없다. 이 일로 강동원을 담당했던 정보형사들이 수난을 겪었던 일 또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김대중 총재가 평민당 살림을 맡기면서 강조하신 말씀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돈은 서울역 대합실과 같아야 한다. 들어오면 반드시 나가야 한다. 호주머니에 넣어 두면 부패하게 된다”고 강조하셨다. 김대중 총재는 강동원의 정확한 회계처리와 철저하고 꼼꼼한 업무능력을 신뢰했다. 특히 독재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과 정직함을 신임했다. 한국정당사에 획기적인 혁신도 강동원의 머리에서 나왔다. 당내의 인사관리, 회계관리, 당무관리를 비롯한 23개의 내규를 입안하고 당무회의에 보고해 채택했다. 이 내규가 중앙선관위에 제출되어 모든 정당에 도입되었다. 당시 당직자와 기자는 물론 심지어 정보기관원들도 ‘도대체 강동원이 누구기에 총재가 직접 돈을 맡기느냐’라며 놀라곤 했다. 김대중 총재는 대통령에 당선 된 이후에도 집권당 새정치국민회의 중앙당후원회 사무총장을 맡겼다. 그의 신뢰가 계속 이어진 것이다. 한국 정당사에 여야를 막론하고 정당 돈을 만졌던 사람들이 대부분 구속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유일하게 구속되지 않은 사람이 바로 강동원이다. 지나칠 정도로 몸에 밴 원칙주의, 뚜렷한 소신, 비리와 불의에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강직하고 청렴한 정치인의 자세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19대 국회의원 300명 중 재산등록이 꼴등이다. 가장 가난한 국회의원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90년 김대중 총재는 죽음을 각오한 단식투쟁 끝에 지방의회를 부활시켰다. 중앙당의 차출로 고향 남원에서 출마, 38세의 나이에 전북도의원에 당선되었다. 그가 당선되자마자 전라북도 공직사회와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최초 의사진행발언, 최다발언, 최다 정책대안제시 등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다. ‘물고 늘어지면 끝장을 보는 의원’, ‘인간 에어컨디셔너’, ‘원칙주의자’, ‘핏기 없는 선머슴’ 등은 언론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도지사를 비롯한 고위공직자들이 그가 분석해 제시한 문제점과 정책대안에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송곳 같은 질문에 공직자들이 혼쭐나기 일쑤였다. 지방방송과 신문의 톱기사는 물론 주요 중앙지의 톱기사도 그의 몫이었다. 그 결과 한국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실시한 전국 광역의원 평가에서 전체 1등을 차지했다. 특히 1993년 미국을 방문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미국쌀 수입을 선언하자 전북도의원 42명의 동시삭발을 유도, 전국적인 반대투쟁을 선도했다. 당시 예결위원장이던 그는 전국 최초로 전북도 새해예산안 심사를 거부, 농정예산의 증액을 요구했다. 도지사가 이를 수용하고 농정분야예산 200억 원을 증액시킨 사례는 헌정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강동원은 한국현대사의 큰 획을 그었던 정치지도자 김대중·노무현 두 분 대통령을 직접 모신 유일한 사람이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은 1994년에 맺어졌다. 1994년 5월 민주당 중앙위원회에서 강동원 제명안건이 상정되었다. 민주당은 15대 총선에서 호남을 싹쓸이했지만 유일하게 민자당 후보에게 패한 지역이 바로 남원이었다. 그것은 중앙당이 공천을 잘못한 결과였는데도 그 책임을 강동원에게 전가했다. 이때 노무현 최고위원이 “젊은 인재를 키워야 할 민주당이 전국 1등 도의원을 제명한다면 결코 민주정당이 아니다”며 부당성을 지적했다. 결국 이기택 총재권한대행은 강동원을 제명하고 말았다. 다음날 강동원은 노무현 최고위원을 찾아가 감사인사와 함께 언젠가는 꼭 은혜를 갚겠다는 약속을 했다. 몇 년이 흘러 2001년 12월, 노무현 해수부장관이 대통령 후보경선을 선언했다. 당시 민주당내 지지도는 이인제가 56%로 대세였고 노무현은 2∼3%에 불과했다. 의리의 사나이 강동원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연히 금강캠프를 찾았다. 노무현 후보가 그에게 맡겨준 임무는 호남담당 조직특보였다. 그는 전남·광주를 오가면서 전주에 지휘부를 구성하고 이인제 필패론과 노무현 필승론을 논리적으로 설파하는 한편 노사모와 협력해 호남돌풍을 창출했다. 당시 경선조직은 총괄 염동연, 영남 이강철, 충청 윤제술, 호남 강동원이 담당했는데 이들을 언론에서는 노무현 5인방으로 불렀다. 강동원은 최근 영화 ‘변호인’을 가족들과 함께 관람하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킨 강동원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인수위, 청와대 조각 등 인선작업이 진행되어 이강철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염동연은 광주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다. 2003년5월 노무현 대통령은 경선팀을 청와대에 초청해 만찬을 하면서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다. 이때 강동원은 “삼일운동 때 독립만세 불렀던 사람들은 뒷전이고 해방되자 만세 불렀던 사람들이 요직을 장악했다”고 비판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강동원은 전주에서 정치개혁포럼과 개혁신당 전북도당을 맡아 17대 총선을 준비했다. 2004년 열린우리당 남원·순창 경선후보로 등록하고 이강래 후보와 경합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반민주적 폭거를 서슴지 않았다. 경선을 하지 않고 이강래를 후보로 결정했다. 삭발투쟁으로 재심을 요구했지만 민주당은 요지부동이었다. 강동원은 20년 동안 함께했던 민주당을 탈당하고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이 사실에 격노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강동원을 농수산물유통공사 감사에 발탁했다. 낙하산으로 임명되었지만 공기업 경영의 투명성 제고에 앞장섰다. 공기업의 잘못된 폐해와 실태를 확인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감사 재직시절의 일지를 토대로 직접 쓴 책 ‘공기업 판도라상자’는 드라마 제작 제의가 들어올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철밥통 공기업’을 잇따라 출간한 것도 그가 얼마나 공기업 혁신에 열중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전자감사시스템을 개발하고 특허출원해 모든 공공기관에 도입토록 했던 사실은 참여정부의 크나 큰 성과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나에게도 성공한 낙하산이 있다”고 국무회의와 수석회의에서 자랑했던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토대로 공기업 감사 시스템을 전면 개편했다. 정부투자기관운영에 관한 법률을 폐기하고 공공기관운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사실이 그 결과였다. ‘대한민국 1등 감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고 농수산물유통공사는 7년 연속 공기업 청렴도 1위 기관으로 우뚝 섰다.
강동원은 1997년 12월 20일 농수산물유통공사를 나왔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는 평소 꿈이었던 해외농업을 연구하기 위해 2008년 2월 홀연히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로 갔다. 고교선배 기업인 김재경 회장(주 인탑스)께 연해주 농업투자를 설명하고 투자를 유도했다. 결국 블라디보스토크에 둥지를 틀어 현지 농업법인을 설립, 3개의 농장인수 작업을 병행하면서 첫해에 3500㏊(1050만평)에 콩과 밀을 경작했다. 농사꾼으로 변신해 2년간 광활한 연해주 벌판에서 손수 농사지은 결과 대단히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뒀다.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국내 대기업과 중견 기업들이 연해주에 진출한 배경에 큰 영향을 줬다. 지금 국내의 해외농업 실전경험이 있는 유일한 전문가로 각광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연해주에서 러시아와 북한을 연계한 농업개발 방안을 연구했다. ‘연해주에서의 남·북·러 농업협력방안 연구’ 논문으로 정치학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통일부의 남북전문가 집단인 신진학자로 선정되어 남북농업협력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강동원은 이런 사람!
1 한국전쟁의 포성이 멈춰가던 시절, 11남매 중 10째로 태어난 ‘전쟁 둥이’강동원은 한국전쟁이 휴전하던 1953년 1월 남원시 덕과면 시골에서 5남6녀 중 10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11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기도 속에 형과 누이들 밑에서 바르게 성장했다. 한국전쟁 전후 보릿고개가 있었던 당시의 농촌은 식량이 없어 기근에 시달리던 실정이었다. 이런 딱한 현실에서 부모님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많은 온정을 베풀었다. 그 결과가 지난 19대 총선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강 후보의 두 손을 잡고 생전의 부모님 선덕을 기억하면서 눈시울을 적시던 노인들은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부모님이 베푼 덕이 고스란히 자식에게 돌아간 것이다.
2 비록 가난했지만 학창시절부터 리더십을 키우고 올곧게 자라나
유년시절부터 리더십이 남달랐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호롱불에 의지했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남달리 공부를 잘했다. 직선 어린이회장에 당선되어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수줍기 그지없는 어린이였다. 담임선생님의 통신부 기록은 “성적 우수하고 리더십 뛰어나지만, 남아다운 기백이 부족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원읍내 용성중학교로 진학해 학교 도서관에서 자취생활을 하면서 청운의 꿈을 키웠다. 3년간 학급 반장을 지냈고 직선 학생회장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넉넉지 않아 대학진학을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그래서 전주상고(현 전주일고)에 응시 장학생으로 진학했다. 1학년에 입학했지만 하숙하지 못하고 남원에서 전주까지 열차통학을 했다. 당시 열차는 증기기관차였다. 왕복 통학시간만도 보통 4시간이 걸렸다. 결국 통학 1년을 정리하고 2학년부터 하숙을 시작했다. 당시 전주남중과 전주상고는 교장선생님이 한 분이었다. 상고 학생회장을 비롯한 모든 간부들을 전주남중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직선 학생회장에 출마, 군 단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했다. 특히 그는 전주시내 남녀고등학교 학생회장단을 결성해 단장으로 활동했다. 학생회장 시절인 1970년은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국이 매우 어수선했다. 전북대 총학과 연결되어 시위를 준비하던 중 전주시내 태극당 제과점에 들이닥친 형사들에 의해 전주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결국 한강수 교장선생님의 각서와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훈육주임 임용래 선생님께 탱자나무 몽둥이로 종아리가 터지도록 매를 맞기도 했고 학교에선 교장명령에 의한 퇴학을 통보하기도 했다.
3.'육군 병장’으로 군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진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학교장 추천으로 영진약품에 입사했지만 3개월 만에 그만 뒀다. 상급자의 담배심부름이 부당하다며 항의하다가 결국 스스로 걸어 나왔다.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리어카도 끌어보고 과외알바도 해보고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강원도 인제군 현리 소재 제3군단사령부 인사참모부 인사서기병으로 군 생활을 마치고 1977년 병장 제대했다. 현역 시절 군단장은 박정희를 저격했던 김재규 중장, 후임은 12.12반란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중장이었다. 국회의원 당선 직후 당시 제102야전병원 간호부장 박말순 예비역 중령을 남원 운봉향우회에서 35년 만에 조우, ‘전선야곡’을 함께 불렀던 일화는 유명하다.
4.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일찍 국회에 들어와 차근차근 정치수업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이던 1978년 12월 10대 총선에 큰형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군에서 제대를 하자마자 형의 총선준비를 했다. 큰형이 선거에서 실패하자 홀로서기를 시도하면서 생활전선에서 뛰어들었다. 그러던 중 전두환 일당이 광주시민을 잔인하게 도륙했던 1980년 봄, 박관현(5.18 당시 전남대 학생회장)의 전남도청 광장 시위현장을 지켜보면서 정치에 뜻을 굳혔다. 박관현 열사는 같은 날 군번을 받고 같은 날 전역했던 3군단사령부 전우였다. 그래서 그는 매년 5월 망월동의 박관현 열사 묘역을 소리 없이 찾아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곤 한다. 그러던 중 1981년 11대 총선에서 당선된 고향선배 이형배 의원의 비서관(입법사무관)으로 정치에 정식 입문했다. 당시 28살에 최연소 비서관으로 정치를 시작했는데 같은 또래로 부산 박종웅, 경기 광주 정진섭 전 의원이 있다. 이렇게 시작한 국회경력이 어느새 34년이 되었다. 날카로운 자료 분석과 솜씨 좋은 문장실력은 다른 국회의원들의 대정부질문서를 대필할 정도로 인정받았다. 전두환 군부세력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던 민주화의 상징 김대중 선생의 비서(민추협 공동의장)로 발탁된 것은 1986년의 일이다. 이후 김대중 선생의 본산이었던 민주인권연구회 총무, 평민당 창당준비위원, 김대중 총재 비서, 평민당 재정국장을 맡았다. 당시 야당의 촉망받는 청년인재로 부상하면서 두터운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5.김대중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비서, 평화민주당의 창당 주역
열혈청년 강동원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섰다. 전두환 군사독재 타도와 직선제쟁취 가투로 매일 최루탄을 뒤집어썼다. 수십 차례 닭장차에 실려 난지도와 충남의 들판에 내팽개쳐졌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때는 집시법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87년 6·10항쟁 당시 독재정권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김대중 선생이 사면 복권되었다. 이 때 양김(DJ, YS)의 후보단일화가 어렵게 되자 김대중 선생의 밀명을 받아 안기부와 경찰 등 정보기관원의 미행을 따돌리고 공덕동 로타리 제일빌딩에서 3일 만에 여의도 잠입에 성공, 대하빌딩 9층을 위장 계약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그 인연으로 대하빌딩 주인 김영도 사장은 13대에 전국구 의원이 된다. 그래서 오늘날 대하빌딩은 정치1번지라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눈물겨운 일화는 끝이 없다. 이 일로 강동원을 담당했던 정보형사들이 수난을 겪었던 일 또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6. 정권교체 이후에도 새정치국민회의 중앙당 후원회 사무총장을 맡아
김대중 총재가 평민당 살림을 맡기면서 강조하신 말씀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돈은 서울역 대합실과 같아야 한다. 들어오면 반드시 나가야 한다. 호주머니에 넣어 두면 부패하게 된다”고 강조하셨다. 김대중 총재는 강동원의 정확한 회계처리와 철저하고 꼼꼼한 업무능력을 신뢰했다. 특히 독재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과 정직함을 신임했다. 한국정당사에 획기적인 혁신도 강동원의 머리에서 나왔다. 당내의 인사관리, 회계관리, 당무관리를 비롯한 23개의 내규를 입안하고 당무회의에 보고해 채택했다. 이 내규가 중앙선관위에 제출되어 모든 정당에 도입되었다. 당시 당직자와 기자는 물론 심지어 정보기관원들도 ‘도대체 강동원이 누구기에 총재가 직접 돈을 맡기느냐’라며 놀라곤 했다. 김대중 총재는 대통령에 당선 된 이후에도 집권당 새정치국민회의 중앙당후원회 사무총장을 맡겼다. 그의 신뢰가 계속 이어진 것이다. 한국 정당사에 여야를 막론하고 정당 돈을 만졌던 사람들이 대부분 구속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유일하게 구속되지 않은 사람이 바로 강동원이다. 지나칠 정도로 몸에 밴 원칙주의, 뚜렷한 소신, 비리와 불의에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강직하고 청렴한 정치인의 자세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19대 국회의원 300명 중 재산등록이 꼴등이다. 가장 가난한 국회의원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7. 전국 최고의 도의원으로 평가받고, 미국쌀 수입반대 삭발투쟁 이끌어
1990년 김대중 총재는 죽음을 각오한 단식투쟁 끝에 지방의회를 부활시켰다. 중앙당의 차출로 고향 남원에서 출마, 38세의 나이에 전북도의원에 당선되었다. 그가 당선되자마자 전라북도 공직사회와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최초 의사진행발언, 최다발언, 최다 정책대안제시 등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다. ‘물고 늘어지면 끝장을 보는 의원’, ‘인간 에어컨디셔너’, ‘원칙주의자’, ‘핏기 없는 선머슴’ 등은 언론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도지사를 비롯한 고위공직자들이 그가 분석해 제시한 문제점과 정책대안에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송곳 같은 질문에 공직자들이 혼쭐나기 일쑤였다. 지방방송과 신문의 톱기사는 물론 주요 중앙지의 톱기사도 그의 몫이었다. 그 결과 한국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실시한 전국 광역의원 평가에서 전체 1등을 차지했다. 특히 1993년 미국을 방문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미국쌀 수입을 선언하자 전북도의원 42명의 동시삭발을 유도, 전국적인 반대투쟁을 선도했다. 당시 예결위원장이던 그는 전국 최초로 전북도 새해예산안 심사를 거부, 농정예산의 증액을 요구했다. 도지사가 이를 수용하고 농정분야예산 200억 원을 증액시킨 사례는 헌정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8. 노무현 대통령 후보시절 조직특보, 호남에서부터 노무현 돌풍 일으켜
강동원은 한국현대사의 큰 획을 그었던 정치지도자 김대중·노무현 두 분 대통령을 직접 모신 유일한 사람이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은 1994년에 맺어졌다. 1994년 5월 민주당 중앙위원회에서 강동원 제명안건이 상정되었다. 민주당은 15대 총선에서 호남을 싹쓸이했지만 유일하게 민자당 후보에게 패한 지역이 바로 남원이었다. 그것은 중앙당이 공천을 잘못한 결과였는데도 그 책임을 강동원에게 전가했다. 이때 노무현 최고위원이 “젊은 인재를 키워야 할 민주당이 전국 1등 도의원을 제명한다면 결코 민주정당이 아니다”며 부당성을 지적했다. 결국 이기택 총재권한대행은 강동원을 제명하고 말았다. 다음날 강동원은 노무현 최고위원을 찾아가 감사인사와 함께 언젠가는 꼭 은혜를 갚겠다는 약속을 했다. 몇 년이 흘러 2001년 12월, 노무현 해수부장관이 대통령 후보경선을 선언했다. 당시 민주당내 지지도는 이인제가 56%로 대세였고 노무현은 2∼3%에 불과했다. 의리의 사나이 강동원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연히 금강캠프를 찾았다. 노무현 후보가 그에게 맡겨준 임무는 호남담당 조직특보였다. 그는 전남·광주를 오가면서 전주에 지휘부를 구성하고 이인제 필패론과 노무현 필승론을 논리적으로 설파하는 한편 노사모와 협력해 호남돌풍을 창출했다. 당시 경선조직은 총괄 염동연, 영남 이강철, 충청 윤제술, 호남 강동원이 담당했는데 이들을 언론에서는 노무현 5인방으로 불렀다. 강동원은 최근 영화 ‘변호인’을 가족들과 함께 관람하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9. 농수산물유통공사 감사 시절, 공기업 전자감사시스템 발명특허를 취득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킨 강동원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인수위, 청와대 조각 등 인선작업이 진행되어 이강철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염동연은 광주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다. 2003년5월 노무현 대통령은 경선팀을 청와대에 초청해 만찬을 하면서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다. 이때 강동원은 “삼일운동 때 독립만세 불렀던 사람들은 뒷전이고 해방되자 만세 불렀던 사람들이 요직을 장악했다”고 비판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강동원은 전주에서 정치개혁포럼과 개혁신당 전북도당을 맡아 17대 총선을 준비했다. 2004년 열린우리당 남원·순창 경선후보로 등록하고 이강래 후보와 경합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반민주적 폭거를 서슴지 않았다. 경선을 하지 않고 이강래를 후보로 결정했다. 삭발투쟁으로 재심을 요구했지만 민주당은 요지부동이었다. 강동원은 20년 동안 함께했던 민주당을 탈당하고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이 사실에 격노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강동원을 농수산물유통공사 감사에 발탁했다. 낙하산으로 임명되었지만 공기업 경영의 투명성 제고에 앞장섰다. 공기업의 잘못된 폐해와 실태를 확인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감사 재직시절의 일지를 토대로 직접 쓴 책 ‘공기업 판도라상자’는 드라마 제작 제의가 들어올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철밥통 공기업’을 잇따라 출간한 것도 그가 얼마나 공기업 혁신에 열중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전자감사시스템을 개발하고 특허출원해 모든 공공기관에 도입토록 했던 사실은 참여정부의 크나 큰 성과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나에게도 성공한 낙하산이 있다”고 국무회의와 수석회의에서 자랑했던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토대로 공기업 감사 시스템을 전면 개편했다. 정부투자기관운영에 관한 법률을 폐기하고 공공기관운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사실이 그 결과였다. ‘대한민국 1등 감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고 농수산물유통공사는 7년 연속 공기업 청렴도 1위 기관으로 우뚝 섰다.
10 . 러시아 연해주에서 해외농장 경영자, 남북농업교류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아
강동원은 1997년 12월 20일 농수산물유통공사를 나왔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는 평소 꿈이었던 해외농업을 연구하기 위해 2008년 2월 홀연히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로 갔다. 고교선배 기업인 김재경 회장(주 인탑스)께 연해주 농업투자를 설명하고 투자를 유도했다. 결국 블라디보스토크에 둥지를 틀어 현지 농업법인을 설립, 3개의 농장인수 작업을 병행하면서 첫해에 3500㏊(1050만평)에 콩과 밀을 경작했다. 농사꾼으로 변신해 2년간 광활한 연해주 벌판에서 손수 농사지은 결과 대단히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뒀다.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국내 대기업과 중견 기업들이 연해주에 진출한 배경에 큰 영향을 줬다. 지금 국내의 해외농업 실전경험이 있는 유일한 전문가로 각광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연해주에서 러시아와 북한을 연계한 농업개발 방안을 연구했다. ‘연해주에서의 남·북·러 농업협력방안 연구’ 논문으로 정치학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통일부의 남북전문가 집단인 신진학자로 선정되어 남북농업협력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11 .19대 총선에서 돌풍의 주역, 호남에서 새로운 정치역사를 쓰다
강동원은 2012년 제19대 총선에 돌풍의 주역이었다. 가장 큰 이변을 연출한 당선자로 언론의 주목을 받은 단골 뉴스메이커였다. 민주당 원내대표, 예결위원장,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4선도전자 민주당 이강래 후보를 보란 듯이 꺾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언론들이 대서특필했고 국내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지역민심이 이미 민주당을 떠난 원인이 컸지만 30년이 넘는 정치이력을 갖고 있는 강동원의 저력이 바탕이 되었다. 중앙언론에서 10대 유망 정치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19대 국회에 진출하자마자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2년 연속 의정대상, 우수국회의원대상을 수상하는 등 그의 진가가 발현되고 있다. 돌풍의 주역 강동원은 또다시 새로운 정치신화 창출을 위해 뚜벅뚜벅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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