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US

CONTACT US

Click here !! for Mobile Phone Cases

Click here !! for Mobile Phone Cases
Mobile Phone Cases

World Clock

Wednesday, March 18, 2015

UPI, 세월호 참사 후 1년 진상 조사는 진척 없어

UPI, 세월호 참사 후 1년 진상 조사는 진척 없어

UPI, 세월호 참사 후 1년 진상 조사는 진척 없어
-세월호 참사는 경제성장이 제1의 목표인 한국에서 경제와 사회 간 성장의 차이가 불러온 비극
-딸을 잃은 김영오씨, 안전한 사회 위해 정부에 개혁 요구할 것

UPI는 11일 세월호 참사 1주년을 맞아 세월호 희생자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오씨를 인터뷰하고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끝나지 않은 싸움과 세월호 진상규명의 현주소를 심층 보도했다.

기사는 평범한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김 씨가 딸을 잃은 뒤 활동가로서의 다른 삶을 살게 됐고 45일간의 단식투쟁과 교황 프란치스코와의 만남으로 저명인사가 됐다고 소개했다. 또한, 김 씨가 일부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친북 주의자로 매도당하기도 했으며 그와 다른 가족들에 대한 언론 몰이로 국민의 세금을 낭비한다는 비난 여론에 처했다고도 말했다. 

UPI는 또한 연합뉴스를 인용하며 3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기사는 이준석 세월호 선장이 중대과실과 승객들을 버려둔 점에 대해 36년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사건의 진상규명에 있어서는 화물 과적과 급변침이 침몰의 원인이라고 추측만 할 뿐 정부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답변하지 못하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지난 11월에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됐음에도 조사위원회 구성을 둘러싸고 정당들이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조사가 착수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했다.

UPI는 이러한 대형 참사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 경제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한국에서 과거에도 다리 붕괴, 백화점 붕괴 등의 여러 대형 참사가 일어났지만 경제 성장과 기업이익이 최우선시되어온 한국의 경제 풍토 속에서 참사의 재발 방지를 위한 비판적 목소리조차 없었다고 지적했다. 세월호를 운영한 청해진 해운 역시 수익 증대를 위해 법 규정을 무시했으며 이러한 대참사들이 일어난 것은 경제 성장과 사회의 근대화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기사는 민간 잠수부들의 수색 작업이 거절당한 것, 해경의 부실한 구조 진행 상황 설명, 미국과 일본 해경의 구조 지원 거부 등을 예로 들며 김 씨가 정부의 구조 작업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이에 김 씨와 가족들은 계속 정부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지만 집권당의 의지 부족과 언론과 보수주의자들의 부정적인 여론몰이로 인해 진상조사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법대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예측하기도 했다.

UPI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낸 김 씨가 파산과 이혼 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 뒤 정규직 일자리를 갖게 돼 점점 나아지고 있던 상황에서 딸을 잃었다고 말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러나 딸이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희생이었으므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앞으로 정부에 확실한 답변을 촉구하고 규제 감독을 강화하는 요구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는 김 씨의 말로 기사를 마무리했다.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UPI 기사 전문이다.
번역 감수: 임옥
기사 바로가기 ☞ http://bit.ly/1GKFCtF
A father’s fight for answers: What caused South Korean ferry sinking?
답을 얻기 위한 아버지의 싸움: 세월호 침몰을 일으킨 원인은 무엇인가?
By Elizabeth Shim | March 11, 2015 at 6:00 AM
upi_0311_2015
Kim1
In this undated photograph, Kim Young-oh, center, poses with his daughter Kim Yu-min, left, and Kim Yu-na. Kim lost his older daughter in the Sewol ferry sinking last year. He is still seeking answers from the South Korean government on the cause of the tragedy. Photo courtesy of Kim Young-oh
날짜 표시가 없는 이 사진에서 김영오씨는 자신의 딸 김유민(왼쪽)과 김유나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 씨는 지난해 세월호 침몰로 큰 딸을 잃었다. 그는 아직까지 한국 정부로부터 그 비극의 원인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제공은 김영오씨
Kim2
Kim Young-oh as a younger father with his first daughter, Kim Yu-min, on left and Yu-na on right. Nearly a year later, Kim said he and other families are still seeking answers from the South Korean government regarding the capsized ferry Sewol. Photo courtesy of Kim Young-oh
왼쪽에 첫 딸인 김유민과 오른쪽에 김유나와 함께한 젊은 아빠 김영오씨. 거의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씨는 자신과 다른 가족들이 여전히 전복된 세월호에 대한 한국 정부의 답변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은 김영오씨
Kim3
Kim Yu-min, left, was on a high school field trip to Jeju island in South Korea when the ferry Sewol capsized and more than 300 passengers died. Kim Young-oh, her father, has become an activist after her death.
김유민(왼쪽)양은 세월호가 전복되고 300명 이상의 승객이 사망했을 당시 한국 제주도로 고등학교 수학여행 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김영오씨는 딸의 죽음 이후 활동가가 되었다.
SEOUL, March 11 (UPI) — Kim Young-oh, a divorced father of two, remembers the phone call he received on the morning of April 16 from his former wife.
서울, 3월 11일(UPI) – 이혼한, 두 아이의 아버지 김영오씨는 전 부인으로부터 4월 16일 아침에 받았던 전화 통화를 기억하고 있다.
“Are you watching the news?” she had asked in a worried tone.
“뉴스 보고 있어?” 걱정으로 가득한 어조로 그녀는 물었다.
Kim had not slept at all. In fact, he had been awake all night, rounding off a long night shift at an auto-parts plant, finishing work at 7:30 a.m. Before returning home for some rest, he had stopped by his neighborhood fitness center where he received the unexpected phone call.
김 씨는 전혀 잠을 자지 못했고,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오전 7시 30분에 끝나는 오랜 야간 근무를 마무리하느라 실제로 밤새 깨 있었다. 휴식을 위해 집으로 돌아오기 전, 집 근처 헬스클럽에 들렀고 그곳에서 그는 예상치 못한 그 전화를 받았다.
“There’s been a ferry accident,” she said. “And our daughter is on that boat.”
“여객선 사고가 있었어”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 딸이 그 배를 타고 있어.”
Kim turned to the nearest television. The broadcast confirmed the news.
김영오씨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TV를 향했다. 그리고 방송에서 그 소식을 확인했다.
But nearly a year later, Kim still doesn’t know the whole story.
그러나 거의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 씨는 여전히 이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한다.
The sinking of the South Korean ferry Sewol killed more than 300, including Kim’s 17-year-old daughter, Kim Yu-min. He said the victims’ families have not received a conclusive explanation of what happened from the government. Since the November passage of a special bill that was supposed to pave the way for an investigation, efforts to establish the probe have only encountered obstacles.
한국 세월호 침몰로 김 씨의 딸인 17세의 김유민 양을 포함하여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는 희생자 가족들이 정부로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확실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진상조사의 길을 열어주리라 기대됐던 세월호 특별법이 지난 11월에 통과된 이후 조사에 착수하려는 노력은 온갖 장애에 부딪혀왔을 뿐이다.
Overloaded cargo contributed to the capsizing of the boat when the captain made a sharp turn off the coast of Jindo, on the southwestern tip of the Korean peninsula, the South Korean news agency Yonhap reported. But why he made that abrupt–and fatal–change in direction has yet to be determined.
한국의 연합뉴스에 따르면, 과적된 화물이 한반도의 남서쪽 끝에 있는 진도 해안에서 선장이 급변침을 했을 때 배가 전복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선장이 왜 그런 갑작스럽고 치명적인 항로 변경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The ferry’s captain, Lee Joon-seok, was convicted of gross negligence in November, and sentenced to 36 years in prison for abandoning the vessel and leaving confused passengers to fend for themselves.
이준석 세월호 선장은 지난 11월 중대과실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배를 버리고 나온 것, 또한 혼란에 빠진 승객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둔 것에 대해 3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Most recently, an official probe into the accident’s cause has been hobbled by fractious disputes between South Korea’s political parties over the investigation committee’s structure.
가장 최근의 일로, 사고 원인에 대한 공식적 조사는 조사위원회의 구성을 놓고 벌어진 한국 정치 정당들 간의 성난 분쟁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태다.
Kim told UPI that victims’ families have been accused of wasting taxpayers’ money even though they seek the passage of improved safety regulations.
김 씨는 희생자 가족들이 개선된 안전 규제법의 제정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국민들의 세금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UPI에 말했다.
For Kim, a deeply personal fight has become a public affair.
김 씨에게 있어 매우 개인적인 투쟁이 공적인 사건이 되어왔다.
Kim became a prominent figure when he staged a 45-day hunger strike in July and August. A daily subsistence of water and salt left him emaciated. After losing nearly 30 pounds, he fell ill and was hospitalized.
김 씨가 작년 7월과 8월에 45일간 단식투쟁을 벌였을 때 그는 저명인사가 됐다. 하루하루 물과 소금으로 버티며 그는 여위어갔다. 거의 30파운드 가량 체중을 잃고 나서, 그는 쓰러졌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In response to his activism, Kim said some South Korean conservatives have lashed out at him, labeling him a pro-North Korean agitator, a dangerous accusation that pits Kim against South Korea’s draconian National Security Law responsible for the dissolution of a left-wing political party in December.
그의 활동에 대해서 일부 한국 보수파들은 맹렬히 비난하며 자신을 친북 선동가로 몰았다고 김씨는 말했는데, 이는 그를 작년 12월 좌파 정당을 해산시킨 한국의 혹독한 국가보안법과 맞서게 만드는 위험한 비난이다.
His request for a direct meeting with President Park Geun-hye was routinely denied. But but he briefly made world headlines when he secured a meeting with Pope Francis, whose trip to South Korea was marked by gestures of support for the families of Sewol victims.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는 그의 요구는 일상적으로 무시됐다. 하지만 한국 방문 중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지지의 표현을 했던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만남이 성사되었을 때, 그는 잠깐 세계뉴스를 장식했다.
Daniel Schwekendiek, an economic historian at South Korea’s Sungkyunkwan University, said the country’s position as one of the world’s poorest countries while facing a communist North Korea made economic growth the most important priority for South Korean leaders. Making haste, though, sometimes came at the cost of public safety, with the collapse of a Seoul bridge in 1994 and a department store in 1995 still remembered as some of the biggest public disasters on record.
한국 성균관 대학교 경제사학자 다니엘 슈베켄디에크는 공산주의 북한과 대치한 상태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의 상황 때문에 한국 대통령들이 경제성장을 가장 우선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급속성장은 역사상 최악의 공공재난 중 몇몇으로 여전히 기억되는 사건들인 1994년 서울의 다리와 1995년 백화점의 붕괴 사건에서와 같이 공공 안전을 때때로 희생시켰다.
“Large-scale disasters such as the sinking of the Sewol tragically remind us that the economic versus social modernization gap has not been closed,” Schwekendiek told UPI.
“세월호 침몰과 같은 대규모 재난들은 경제적 현대화와 사회적 근대화의 간극이 해결되지 못했음을 비극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고 슈베켄디에크 교수는 UPI에 전했다.
Yonhap reported in October that diminishing passenger revenue prompted the ship operator, Chonghaejin Marine Co., to overload cargo against regulations.
10월에 연합뉴스는 여객 운임수익이 줄어드는 것 때문에 세월호 운영사인 청해진 해운이 규정을 위반하면서 화물 과적을 했다고 보도했다.
But Schwekendiek said that past disasters were not followed by critical voices that highlighted the negative effects of aggressive business interests.
그러나 슈베켄디에크는 과거의 재난들이 있은 후 급속히 사업이익을 내는 일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강조하는 비판적 의견들이 없었다고 말했다.
Born into rural poverty
빈곤한 시골에서 태어나
Like many South Koreans in the 1960s, Kim Young-oh, 46, was born into rural poverty, in an area that was so destitute there was “no access to transportation. Nothing to eat.”
1960년대의 대부분 한국인들처럼 46세의 김영오씨는 너무 궁핍해서 “교통편도 없는”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먹을 것도 없었다.”
Kim, along with his siblings, was sent away from home to a city where he could attend school. He dropped out at age 15 – beginning what he said were decades of trouble with money.
형제자매들과 함께 김 씨는 고향 집을 떠나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도시로 나가게 됐다. 그는 15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그로부터 수십 년간 돈 문제로 인한 고난이 시작됐다.
When his first daughter, Yu-min, was born, Kim was beginning to struggle with his clothing store. He had borrowed substantially from banks, but was unable to pay his bills. He declared bankruptcy around the time of the 1997 Asian financial crisis.
첫 딸 유민이가 태어났을 때, 김 씨가 운영하는 옷 가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김 씨는 은행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돈을 빌렸지만 청구서들을 낼 돈이 없었다. 그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파산했다.
It was money troubles, Kim said, that led to his divorce in 2003. After decades of wandering from one temporary job to another, in 2012 Kim had a breakthrough: a full-time position with benefits.
김 씨는 2003년 이혼을 한 것도 돈 문제였다고 말했다. 임시직으로 이곳 저곳을 떠돌며 십여 년을 보낸 2012년 김씨는 돌파구를 찾았다: 그때서야 혜택이 주어지는 정규직 일자리를 갖게 됐다.
“I remember telling my daughter then,” he said, “that I had good news…telling her that she can go to college now. We can afford to send her to university.”
“그때 우리 딸에게 말하던 것이 생각난다”고 그는 말했다. “좋은 소식이 있다고…내 딸에게 이제 너는 대학에 갈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너를 대학에 보낼 형편이 된다고.”
Kim said Yu-min was good with numbers, excelling in her math classes. Two months before the ferry sinking, they talked about a career in banking after graduation.
김 씨는 유민이가 숫자에 강해서, 수학 성적이 좋았다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 두 달 전, 유민양과 김 씨는 유민이가 학교를 졸업한 후 은행원이 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Things were looking up for his family, Kim said.
김 씨는 자기 가족의 상황이 나아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In search of Yu-min
유민이를 찾아서
On the morning of the accident, Kim and his ex-wife rushed to Jindo, where the rescue and recovery efforts were taking place.
세월호 침몰 당일 아침 김 씨와 김 씨의 전 부인은 구조 작업이 진행되고 있던 진도로 급히 향했다.
“It took us eight days to be reunited with Yu-min,” he said, recalling identifying the body and complying with DNA tests before they could claim her.
“우리가 유민이를 다시 만나는 데에는 8일이 걸렸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 씨는 말하면서, 유민이의 시신을 인도받기 전 유민이의 시신을 확인하고 DNA 검사를 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Kim said the rescue efforts were hindered by red tape, with rescuers denied entry into the waters to search for survivors and a lack of updates from the South Korean Coast Guard that left families speculating about the causes for the rescue’s delay. Families like Kim’s became frustrated, he said, as efforts were postponed.
김 씨는 구조 작업이 행정 절차에 의해 방해받았고, 구조자들은 생존자 수색을 위해 물속에 들어가는 일을 거절당했으며 해경은 구조 작업에 대해 최신 정보를 제대로 주지 않아서 유족들은 구조 지연의 이유를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 씨와 같은 다른 유족들이 구조 노력 지연으로 좌절감을 느겼다고 김 씨는 말했다.
According to separate reports from Stars and Stripes and Japan’s Yomiuri Shimbun, the South Korean government declined offers of help from the U.S. Navy and Japan’s Coast Guard.
스타즈 앤 스트라이프스(역주: 미국 육군 기관지)와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으로부터의 별개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미국 해군과 일본 해경의 구조 지원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Victims’ families have sought answers about their government’s inaction, but none have been given.
희생자 가족들은 정부의 무대책에 대한 답을 찾고 있으나, 얻은 것이 없다.
Park Chan-un, a law professor at Hanyang University, told UPI that it will not be easy to move forward with special investigations because South Korea’s governing party has delayed providing answers that satisfy the victims’ families, and a general mood of opposition and resentment has formed toward the activists in the media and among conservative South Koreans.
박찬운 한양대 법대교수는 한국의 집권당이 희생자 가족들을 만족시킬 만한 답변을 제공하기를 미루고 있고, 언론과 한국의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행동가들에 대한 전체적인 반대 분위기와 분노가 조성되고 있기 때문에 특별 조사가 진행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UPI에 말했다.
Kim, meanwhile, said he will push on for reform and answers from his government about regulatory oversight, a matter that the Korea Herald reported is being addressed in a new anti-corruption bill.
한편 김 씨는 개혁안이 받아들여지도록, 그리고 코리아 헤럴드가 보도한 대로 새 반부패법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규제 소홀에 대한 정부의 답변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According to the Herald, initial findings revealed South Korean maritime officials received kickbacks from the Sewol’s ship operator which may have contributed to the ferry violations.
헤럴드에 따르면, 초기 조사 결과에서 한국 해양 관료들이 세월호 선박 경영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이 드러났으며, 이 사실은 세월호의 위법 사항들이 만들어지는 데에 기여했을 수 있다.
“Before the tragedy, I had no idea how lax Korea’s safety regulations were,” Kim said.
“참사 이전에, 나는 한국의 안전 규제가 얼마나 느슨한지 몰랐다”고 김 씨는 말했다.
“I have lost my daughter, but at the same time, I’m proud. Yu-min died for a movement to make Korea a better and safer society.”
“나는 딸을 잃었고, 그러나 동시에 나는 자랑스럽다. 유민이는 대한민국을 더 나은, 그리고 더 안전한 사회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을 위해 죽었다.”
[번역 저작권자: 뉴스프로, 번역기사 전문 혹은 일부를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십시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