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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April 27, 2015

박근혜 묻는다…"'남영동 1985' 봤나?"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정지영 "세월호, 역사적 트라우마로 남기 전 치유해야"

<남부군>·<하얀 전쟁>·<부러진 화살>·<남영동 1985>·<천안함 프로젝트>·<영화판> 등 모두 우리 시대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사회적 성찰을 시대적 화두로 던진 작품들이다. 

곧 칠순이 되는 평생을 영화인으로 살아온 노련한 노장(老壯) 감독 정지영. 그의 깊은 사회적 성찰이 담긴 메시지는 작품 발표와 동시에, 공론과 토론의 장을 오갔다. 이것이 그가 관객과 대화하는 방식이다.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하자.' 이게 영화를 만드는 기본적인 나의 목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영화가 상영된 후 공론이 일고 토론이 발생하면, 너무 기분이 좋다. 좋게 말하면 토론이고 나쁘게 말하면 논란인데, 논란이 되는 주제 대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지만 침묵하고 있었던 중요한 가치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묻어두는 것보다는 들춰내서 토론의 장을 펼치는 게 맞다고 본다."

누군가에게는 '빨갱이 감독'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는 이 괴물 같은 질병을 오히려 '그러려니…' 받아치며 근본적인 문제는 '분단이 가져온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라고 보지 않는다. 이 모든 딜레마가 분단 모순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중략)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대한민국. 글로벌시대에도 불구하고 한쪽으로는 민족문제를 화두로 삼아야 하는 나라, 분단 모순으로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이 왜곡된 비정상적인 나라이자 불행한 나라다. 분단 모순만 극복하면 한국은 아마도 훌륭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1년이 지났는데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여전히 지지부진한 것은 분명 정치의 문제다. 영화인으로 세월호 동조 단식에도 앞장섰던 정지영 감독은 곪아버린 정치, 움직이지 않는 정치권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정치권이 해줘야 하는 일 아닌가. 그래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을 모두 비판할 수밖에 없다. 그들 모두 은연중에 세월호가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고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 엄청난 비극을 눈감고 묻어버리면 상처는 곪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썩은 채로 도려낼 생각인가. 언제든 곪아 터질 상처를 왜 이렇게 방치하는지 모르겠다. 고름을 째 내고 치료해야 하는데, 지금 권력자들은 이를 감추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온 국민에게 역사적 트라우마로 남기 전, 빨리 치유해야 한다."

▲ 정지영 감독. ⓒ프레시안(최형락)

- <부러진 화살>·<남영동 1985>·<영화판> 등 최근 작품은 패기 있는 젊은 감독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정지영' 하면 젊은 느낌이다. 그런데 곧 칠순이 된다니, 조금 놀랐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사회고발 성격의 영화라 젊게 느껴져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결론을 말하자면 내가 젊기 때문이다.(웃음) 곰곰이 생각해보고 점검한 결과 그렇다. 나쁘게 말하면, 철이 늦게 든 거다. 다른 사람들이 나이 오십(理順)에 깨달을 것을 나는 지금 깨닫는다. 이 말은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눈이 늦다는 것이다. 내게 지금 사십 대 후반 정도의 안목과 깊이밖에 없기 때문에 영화가 젊을 수밖에 없다. 지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하나의 사건)을 통해 실체를 알고 난 후에 의미를 깨달아 온전하게 내 것이 되는 시간이 항상 늦다.

- 반전이다.(웃음) 충북 청주에서 아버지가 사촌 형에게 내준 헌책방의 책을 다른 곳에 몰래 팔아넘겨 영화를 보러 다녔을 정도로 '영화에 미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들었다. 소년이자 청년 정지영은 어떤 학생이었나.

학창 시절, 무척 한심했다. 아버지가 대학교수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설득해 전문 서적을 판 돈으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 한마디로, 전문 지식을 팔아서 오락을 취한 것이다. 얼마나 한심한 짓인가. 그 덕분에 나는 영화감독이 됐지만….(웃음) 분명 나쁜 짓이었다. 당시 중학생이 영화를 본다고 얼마나 깊게 봤겠는가. 예쁜 여배우 보고 재밌는 이야기 들으려고, 영화를 본 거다. 도둑질이었지 뭐….(웃음)

- 1946년 출생이다. 6.25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있나? 

기억은 거의 없고 생각나는 몇몇 장면이 있다. 청주에 살 때였는데, 밖에서 총소리와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마루로 나갔는데, 한두 살 많던 옆집 아이가 밖에 나가기에, 내가 '어디를 가느냐?'라고 물었더니 '총탄을 주우러 간다'고 했다. '난 무서운데, 쟤는 참 용감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전쟁 중에 청주보다 더 시골인 옥천으로 피난을 갔는데, 동네 아이들이 내가 도시에서 왔다고 나를 따라다니며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하며 놀리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난 애들하고 어울릴 생각에, 대답도 잘해주고 했었다. 그리고 시골 밤이 무척 무서웠던 기억, 밤마다 누나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줬던 기억이 있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 피난 여정에 관한 이야기 등 자세한 건 나중에 들었다.  

- 언제부터 영화감독의 꿈을 꾸었는지, 계기가 있었는지?  

사실 영화는 재미로 봤고, 중학교 때 나름 문학소년이었다. 집이 책방을 해서 이것저것 주워서 읽다 보니 그렇게 됐다. 처음에는 추리소설 위주로 보다가 중학교 3학년 때 본격 문학을 접했다. 가장 쉽게 접근한 것이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세계전후문제작품집>(1962~1963)으로, 전후(戰後) 주목할 만한 작품을 모아놓은 책이었다. 1권에서 7권까지는 한국·미국·불란서(프랑스)·영국·독일·남북구(남북극)·일본 편이었고, 8권과 9권은 각각 한국과 세계의 시를, 10권은 세계의 희곡(시나리오)을 모아놓은 책이었다. 이 책을 보면서 인간과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운 것 같다. 

특히 한국 편에는 당대의 한국 작가 중단편이 실려 있었다. 그때 이범선(1920~1982)의 <오발탄>(1959년 10월 <현대문학>에 발표됨)을 읽었다. 후에 영화잡지에 실린 오발탄 시나리오를 우연히 봤다. 원작이 단편소설이었기 때문에 시나리오에는 에피소드가 더 많이 들어가고 등장인물도 추가돼 한 편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참 재밌었다. 하지만 영화 <오발탄>(오현목 감독, 김진규·최무룡 주연)은 1961년 4월 13일 개봉됐지만, 5.16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상영이 금지됐다. 어렸지만, '정부에서 싫어하는 영화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2년 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영화가 재상영됐다. 그때 <오발탄>을 보면서 이전까지 재미로만 봤던 영화를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됐다.  

<오발탄>을 보기 전에는 영화를 그냥 봤는데(see), 이후 영화를 처음으로 읽었다(read). 소재가 시나리오를 거쳐 영상으로 펼쳐지는 과정을 보면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영화감독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전까지는 습작용으로 소설도 쓰고, 그림도 즐겨 그리고, 노래도 한 번 들으면 쉽게 익히고 해서 그런 쪽에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역시 종합예술인이 맞아' 라고 합리화하면서 영화감독이 되기로 했다.(웃음)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런 다짐을 했고, 지금까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채 왔다.  

- '영화는 종합예술'이고 '영화인은 종합예술가'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한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압축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눈(시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발탄>을 비롯해 사회와 세상을 보는 관점에 영향을 준 특별한 사건이 있는가.  

우선 <오발탄>의 영향이 크다. <오발탄>은 당시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온 한 가족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것으로, 전후 서울의 풍경을 그린 영화였다. 거기에 인간 실존의 의미를 질문으로 던졌다. 제목의 '오발탄'은 주인공 스스로 자신을 '신의 오발탄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스스로를 잘못 태어난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범선 작가는, 당시 기독교 계통의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결국 해고됐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문제 삼은 것은 주인공(계리사 사무실 서기 송철호)의 어머니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매일 밤 "가자! 가자!"라고 외친 부분이었는데, 정권의 반(反)공산주의적 시각이 <오발탄> 상영을 금지한 것이다. 그 말이 '북한이 더 좋다'라는 뜻이 아닐 텐데…. 이렇게 협소한 시각으로 작품을 봐서는 안 된다.

이런 전후 작품이 나의 청소년 시절을 좌우했다. 비단 한국 전후 작품뿐 아니라, 세계대전 이후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전후시대라는 것은 전쟁으로 자기가 생각하던 모든 가치가 무너진 시대를 말한다. 반면,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는 반어적인 세상이기도 하다. 전복적·반어적 가치를 얘기하는 작품이다 보니, 인간과 사회에 대해 얼마나 냉소적이겠는가. 그 때문에 인간애(愛), 즉 부모와 자식 간 사랑이나 친구 사이의 우정 같은 살가운 것보다는 이념과 사회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시대적 환경 속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1998년 <까> 이후로 13년 만에 <부러진 화살>(2011)로 복귀해 쾌거를 거뒀다. 그동안 제작비 등의 문제로 준비하던 영화가 좌초되거나 실패했다고도 하던데, 어려운 시간이 있었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13년 동안 무척 고생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계속 영화 준비를 한 시간이었다. 님 웨일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아리랑>의 시나리오를 쓰느라, 8년 이상 많은 시간을 보냈다(명필름이 제작을 맡았으나, 2007년 결국 중단됐다). 중국 혁명기를 그린 작품이라 중국 정부의 검열에 신경을 써야 했다. 주인공 김산이 조선독립을 위해 중국에 건너가 혁명의 과정에 휩쓸리다 연안(延安)으로 와서 중국 공산당을 위해 활동했는데, 간첩으로 몰리면서 북한 공산당에게 처형당하는 이야기다. 사후 50년이 지난 1980년대에 사면복권이 됐지만, 이런 주인공을 그리다 보니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엄청난 제작비도 부담이었고, 그래서 보류했다. 그 뒤에도 작품 하나를 하려다 잘 안됐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 <부러진 화살>을 만들게 됐다.

물론 경제적 고생은 했다. 그런데 이런 고생은 평생을 해온 것이라, 익숙하다. 익숙한 고생.(웃음) 그냥 견뎌왔던 것이지, 특별히 엄청난 고통과 쓰라림은 없었다.  

- 영화 제작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지? 

한 번도 없다. 어떤 사람은 영화를 찍다 실패하거나 그 실패가 계속되면 '영화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실패했어도 그렇게 크게 좌절하지 않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좋은 일이 생겼다고 크게 기뻐하지도, 슬픈 일이 생겼다고 크게 슬퍼하지도 않는 편이다.  

- 빨치산의 나약한 인간적인 면모를 그려낸 <남부군>(1990),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다룬 <하얀 전쟁>(1992), 사법부와 일반 국민의 관계를 들여다본 <부러진 화살>, 한국의 영화산업을 파헤친 <영화판>(2011), 엄혹한 군사독재시절 민주화 운동가들에 대한 고문을 고발한 <남영동 1985>(2012) 등 모두 사회적 성찰을 담은 메시지로 시대적 화두를 던졌다. 또한 논쟁도 불러왔다. 그만큼 관객들을 자극한 것이다. 이런 토론의 장을 실제로 기대했었는지? 

영화를 만들 때는 항상 많은 관객이 봐주기를 기대하며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그러면 안 된다. 자기의 고집스러운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이해해 주지 않아도 자기 나름의 방법대로 작업해야 한다. 예술가는 그런 면에서 관객이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너무 쉽게 이해하면 자존심이 상한다. 

그런데 나는 반대다. 영화를 만들면서 항상 '이렇게 찍으면 관객이 잘 모를 텐데? 이렇게 하면 관객이 이해하지 못할 텐데…'라며 점검한다. 항상 관객을 의식하며 영화를 제작한다. 이다. 이 말은 되도록 영화를 통해 많은 관객을 만나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영화에서 던진 이야기, 질문 등에 대해 많은 사람들과 논하고 싶다.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하자.' 이게 영화를 만드는 기본적인 나의 목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영화가 상영된 후 공론이 일고 토론이 발생하면, 너무 기분이 좋다. 좋게 말하면 토론이고 나쁘게 말하면 논란인데, 논란이 되는 주제 대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지만 침묵하고 있었던 중요한 가치의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묻어두는 것보다는 들춰내서 토론의 장을 펼치는 게 맞다고 본다.  

- 그러나 영화 <남부군>, 다큐멘터리 <천안함 프로젝트>(2013) 등의 작품에 대해서는 호불호(好不好)를 분명히 하며, '빨갱이' 감독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념 논리가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 혹은 '종북'이라고 비난받을 때 마음이 어떤지, 또 어떻게 대처했는지 궁금하다.

영화는 일단 자기가 만들고 나면, 이후에는 자기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관객은 각자 자기 삶과 철학으로 영화를 보기 때문에 만든 사람과 똑같이 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남부군>에 대해 좌(左) 쪽에서는 빨치산을 나약한 휴머니스트로 그렸다고 비판했고, 우(右) 쪽에서는 빨갱이를 미화했다고 손가락질했다. 각자 자신의 시각으로 영화를 보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이 우리 사회를 더욱 생산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한국 사회가 가진 특징이다. 

현재 한국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라고 보지 않는다. 이 모든 딜레마가 분단 모순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대한민국. 글로벌시대에도 불구하고 한쪽으로는 민족문제를 화두로 삼아야 하는 나라, 분단 모순으로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이 왜곡된 비정상적인 나라이자 불행한 나라다. 분단 모순만 극복하면 한국은 아마도 훌륭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흥행의 실패가 영화의 성패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흥행에 실패하면, 관객과 소통하지 못했다는 자책에 함께 작업한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한계 등 수많은 감정이 교차할 텐데 어떻게 처리하는 편인가. 

반성해야지.(웃음) 내가 할 수 없는 마케팅과 영업 등을 제외하고, 내가 한 일 중에서 무엇을 잘못했나 면밀히 살피고 반성한다. 반성하다 보면 뭐가 나온다. 물론 그 반성 전에 같이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기대에 못 미쳐 미안하단 말부터 전한다.  

- 혹시 대표적인 반성작이 있나.  

<남영동 1985>.(웃음) 극장에서 100만 명만 봤으면 하고 바랐다. 그 이상은 욕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보기 힘든 영화였기 때문이다. 당시 2012년 대통령 선거도 있는 정치의 계절이어서 조금 기대를 했는데, 그 기대에 못 미쳤다. '전 국민이 봐야 할 영화'라는 입소문이 났지만, 관객수가 33만여 명에 그쳤다(2015년 4월 22일 영화진흥위원회 제공 누적 관객수 334,619명). 개봉한 다음에 반성하면서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남영동 1985>를 보다가 나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더라. 영화가 지나치게 끔찍했던 것이다. 고문 장면을 찍을 때 관객들이 고문당하는 느낌을 받게 하려고 했는데, 그게 너무 지나쳤던 것 같다. '관객의 감정을 계산하면서 고문 장면을 배치했어야 했구나' 생각했다.  

- 2012년 11월 <남영동 1985>을 개봉하면서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박근혜 후보가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어떤 바람이 있었던 건가.  

영화 개봉 당시가 대선 직전이었다. 그래서 <남영동 1985>를 보고, 박근혜 후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기 아버지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지 않나. 물론 영화의 배경은 전두환 정권이지만, 박정희 정권 이야기도 나온다. '군사독재'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배우가 극악무도한 악인이나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인물을 연기는 경우, 감독이 민감한 사회문제를 주제로 하는 영화를 제작할 경우 후유증이 상당할 것 같다. 영화를 찍고 난 이후에 어떻게 회복하는 편인가? 


실제로 <남영동 1985>를 제작한 뒤 아팠다. 영화 촬영 당시 배우와 스태프 모두 고통스러워했다. 그 고통이 내게 돌아온 복수인 양 정말 많이 아팠다. <남영동 1985>를 찍을 때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 안 피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매일 저녁, 술을 마셨다. 정신적으로 힘든 것뿐만 아니라 몸도 아팠다. 영화 촬영이 끝나고도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 얼마 동안이나?  

몇 개월을 끙끙대다 실제로 몸에 문제가 생겨서 수술까지 했다. 나만 그랬겠나. 박원상 씨와 이경영 씨도 오랫동안 힘들어 했다. 고문 피해자 역을 한 박원상 씨보다 가해자 역할을 한 이경영 씨가 더 힘들어 했다. 연기라고 해도 그 후유증이 정말 컸던 모양이다.  

- 2005년 10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다양성 협약'이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된 이후, 한국의 스크린쿼터는 다른 나라들이 문화 정책의 모범으로 삼는 제도가 됐다. 그러나 한미FTA가 진행되면서 스크린쿼터 폐지 논란이 일었다. 당시 범(凡) 영화인들이 반대 투쟁을 벌였고, 배우 안성기 씨와 함께 스크린쿼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영화인들에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지만, 일부에서는 '밥그릇 챙기기'라는 오해와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이 만약 밥그릇 챙기기였다면, 더 치열했어야 했다. 물론 영화인들에게는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면, 그만큼 설 자리가 없어졌을 테니 생존권의 문제이기도 했다. 밥그릇 챙기기라고 비판한 이들을 그래서 바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밥은 먹고 살아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물론 '어떤 배우는 외국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사수를 비판한 사람들은 대중의 여론을 자기식으로 환기시키려고 여러 가지 수를 썼다. 그런 노력의 연장선에서 '벤츠 타고 양담배 피우는 배우들,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생존권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한국의 영화 문화가 없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집요하게 싸웠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스크린쿼터가 반으로 뚝 잘렸지만, 투쟁 과정에서 한국 영화인의 의식은 상당히 고양됐고 사명감까지 갖추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 밑바탕에서 오늘날의 한국 영화가 나온 것이라고 본다. 만약 그런 영화사적 과정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한국 영화가 세계시장에서 이렇게까지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긍지를 가지고 당시 싸움을 종종 되돌아본다.  

- 다큐멘터리 <천안함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2013년 8월 언론시사회에서 "'천안함'은 우리 사회 '소통의 단절'을 담았다"고 했지만, 천안함 유가족과 해군 장교들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상영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었나.  

국가가 어떤 사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국민은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천안함 프로젝트>나 <다이빙 벨>(안해룡·이상호 감독, 2014)의 소재가 된 사건들은 의문투성이 문제가 너무 많다. 해명을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르지만, 국민들에게 속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과 소통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의심할 수밖에 없다. 몇몇 사람만 의아해 하는 것도 아니고, 전 국민이 의문을 가진 것 아닌가.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정부에 친화적인 사람들을 향해 '저 새끼들은 빨갱이들이다'라고 말하며 편 가르기를 한다. 정부를 비판한다고 빨갱이인가? 물론 대다수의 국민은 그 말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있는 것이다. '그러려니…' 한다.  

- 영화 제작에 있어, 지금까지 대기업(거대 자본)과 작업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상업 영화로 흥행해서 소위 '천만 관객'을 넘어보고 싶은 유혹 같은 것은 없었나.  

'천만 관객을 넘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거대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있다. 그게 현재 한국 영화 산업이 가는 길이다. 기회가 된다면,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기업 또는 거대 자본과 작업을 해봐야 문제가 발생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아닌가. 하지만 내가 '천만 관객' 영화를 만드는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것 같다. '왜 꼭 관객이 천만 명이 되어야 하지? 내가 선택한 작품은 '천만 관객'은 아닐 것이다'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런데 최근 <삼별초>라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이 정도 영화면 '천만 관객'쯤은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어떻게 만들까?' 하고 머리를 굴려보니, 내용 자체가 천만 명이 들것 같다는 자신감이 든다. 나도 '천만 관객' 감독이 되려나? 생각하니, 재미있다.(웃음) 

- 대기업의 투자를 받을 기회가 없었던 것인가.  

2008년 <이리> 이후, 13년 만에 <부러진 화살>을 제작했다. <부러진 화살>은 처음부터 대기업과 만나기 힘든 작품이었다. 사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는데, 대한민국 대기업이 투자하겠는가. 다음으로 만든 영화가 <남영동 1985>인데, 이 역시 뻔하지 않나. 다행히 <부러진 화살>의 흥행(2015년 4월 22일 영화진흥위원회 제공 누적 관객수 346만여 명. 역대 흥행 순위 102위)으로 돈을 빌리기는 쉬웠지만, 처음부터 저예산으로 만든 작품이다.  

- 2012년 12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영화계가 대기업을 중심으로 재편되다 보니 신인 감독들이 스타만 캐스팅해오면 돈을 준다"며 "조금 더 뜸을 들인다면 좋은 재목이 될 수 있는 씨앗들을 너무 일찍 사장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대기업이 본인과 같은 또래의 노장 감독은 "감각이 늙었다며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대기업이 과학과 통계를 바탕으로 (영화의 투자와 흥행을) 예상한다고 해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기본적으로 나이 많은 감독을 만나기 꺼린다. 힘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데, 동방예의지국이라 노장 감독에게는 그 힘을 마음대로 행사하지 못하니 불편한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 든 감독들은 감각이 낡았다고 핑계를 댄다.

대기업의 투자 기준은 좋은 시나리오와 감독이 아니라, '출연 배우가 누구냐?'이다. 그래서 A급 배우를 섭외하려고 노력한다. A급 배우란, 인기 있는 배우를 말한다. A급 배우가 캐스팅된 시나리오라면, 시나리오와 감독이 B급이라도 대기업은 투자를 한다. 이게 대한민국 대기업이 가진 영화에 대한 투자 안목이다. 영화의 성공 가능성을 배우에 의존하는 것이다. 사실 영화계가 이런 투자 행태에 좌우되는 한, 한국 영화의 미래는 밝지 않다. A급 배우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나리오와 새로운 소재로 승부수를 띄우는 최소한의 도전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독립영화로 성공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진모영 감독, 2014)는 확률상 만분의 일이 될까 말까 하기 때문에 도전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지난해 전체 영화산업 매출이 2조276억 원, 극장 입장권 매출액이 1조6641억 원으로 해마다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2014년 개봉한 영화만 217편이다. 그런데 스크린을 통해 상영된 영화 중 눈에 띄는 건 몇 편에 불과하다. 영화산업은 성장하는데, 반대로 실패하는 영화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평생 영화를 제작해온 감독으로, 한국 영화시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대기업이 한국 영화산업을 이끌어가는 시스템, 소위 수직 계열화된 구조가 문제다. 이것이 고쳐지지 않으면, 한국 영화는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대기업이 투자한 영화 외에 다른 영화는 상영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가게가 문을 안 여는데, 관객이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나. CJ, 롯데 등 대기업은 투자만 하고 제작하지 못 하게 해야 한다. 영화 상영과 배급도 분리해야 한다. 자기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작품을 발로 차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 영화인 또한 넓은 의미에서 노동자이다. 그런데 상품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한 작품 또는 노동자들은 실로 처참한 대우를 받고 있다. 영화계에 가장 보장받아야 하는 노동권과 노동환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최근 전국영화산업노조도 생기면서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노조 간에 표준계약서가 만들어졌다. 영화계가 노동면에서 상당히 발전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잘 모른다. 다만 영화계 일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인 것은 사실이다. 촬영 스텝들을 월급을 주며 데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영화계 노동자들이 일이 없을 때 생계를 보장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 같다. 물론 영화를 하고 싶어서 이 업계에 들어온 것이지만,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제도적으로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영화 산업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 지난해 8월 세월호 특별법 제정 동조 단식을 하면서 "침묵은 공범이다"라고 했다. 특히 정지영 감독뿐 아니라, 많은 영화인이 참여했다. 그런데 일간베스트의 폭식 투쟁 같은 상반된 일도 벌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봤나.  

현재 한국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라고 보지 않는다. 이 모든 딜레마가 '분단 모순'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면, 한국이 정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본다. 힘들더라도, 그 모순을 넘어서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이것을 이용하려고만 한다. 이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정치권이 해줘야 하는 일 아닌가. 그래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을 모두 비판할 수밖에 없다. 그들 모두 은연중에 세월호가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고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이 엄청난 비극을 눈감고 묻어버리면 상처는 곪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썩은 채로 도려낼 생각인가. 언제든 곪아 터질 상처를 왜 이렇게 방치하는지 모르겠다. 고름을 째 내고 치료해야 하는데, 지금 권력자들은 이를 감추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온 국민에게 역사적 트라우마로 남기 전, 빨리 치유해야 한다. 

- 새로운 진보 정치세력화를 선언한 국민모임 공동대표다. 정치 참여에는 지금까지 다소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자기의 정치적 안정만을 위해 행동하는 기존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참여하게 됐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정치에 참여한다기보다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된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야당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자극을 주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회의원 배지 하나에 전전긍긍하면서 개인을 위해서 정치하는 기존 정치인의 모습이 너무 한심하다.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 모두 이미 보수당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가진 정책 현안은 다 보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세력이 미약하지만 정의당, 노동당 등 진보 쪽에서 규합해서 새로운 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재 대한민국은 절름발이다. 한쪽 날개로 간신히 날고 있다. 세계에 이런 나라가 어디에 있나. 절름발이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새정치민주연합과 같은 보수 야당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진보야당이 있어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1976년 서른 살에 조감독으로 시작해 약 40년 동안 영화인의 삶을 살아왔다. 기쁜 적도 좌절했던 적도 있었을 텐데, 무엇이 '정지영'을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고 생각하나. 
 

철이 늦게 든 것?(웃음) 뭘, 잘 모른다. 가장의 책임감 같은 것을 좀 알면, 집이 힘들 때 '영화를 그만둬야 하나?'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난 아무리 배고파도 영화가 아니면 할 게 없다. 이런 철없음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온 것 아닐까? 나쁘게 말하면, 이기적인 거다. 영화를 하고 싶으니까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영화가 아니고선,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것 같다. 물론 1987년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외침 속에 '직선제개헌 1천만 명 서명운동'에 동참한 뒤, 당분간은 영화를 못할 것 같아서 아내에게 '포장마차나 해볼까?'라고 말했던 적은 있다.(웃음) 물론 6.29민주화선언으로 금방 풀렸지만…. 사회적 여건이 그랬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해볼까 했던 거지, 개인적으로 영화 외에 다른 것을 해볼 생각은 안 했다. 무모한 거지.(웃음)

- 정지영에게 영화란? 

기본적으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영화가 아니겠나. 나는 태생적으로 혼자 생각하고, 혼자 꿈꾸는 사람이 못 된다.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보기도 했는데, 나는 그런 스타일이 안 되더라. 뭔가를 떠올리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밥그릇의 수단으로 영화를 선택한 것이다.(웃음)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기본적으로 나보다 젊은 후배들에게 '어떻게 살아라' 하고 충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데, 마치 어떤 정답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본다. 그래도 정 말을 하라면, 이렇게 사는 게 유리한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적어도 청년이라면 '내가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먼저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대개 비극은 자신은 '어떻게' 살고 싶은데, 자신의 직업이 그 '어떻게'를 뒷받침해 주지 않아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먼저 어떻게 살까를 정하면, 저절로 그렇게 살기 위해서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결정을 하기가 쉽고, 대부분 그게 가장 본인에게 맞는 직업이든 일이든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 치고, 부자로 살기를 원하면서 정치인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은 없을 것 아닌가. 만약 그렇게 살려면, 부정부패해야 하고 감옥에 가야 할 테니 말이다.(웃음) 자유롭게 살고 싶은 사람은 공무원이나 평범한 직장인이 될 꿈을 버려야 한다.

- 정지영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문학적이나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자유 말고, 정치·사회적으로 쓰는 자유가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상당히 퇴색시키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자유민주주의 국가·자유시장경제·신자유주의 하는 말들이다. 사실 이런 말은 자유를 엄청나게 구속한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 체제에서 이것을 부정하는 모든 사람은 빨갱이가 되는 것 아닌가. 자유시장경제도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시장을 장악한 놈이 주인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 대부분은 그 시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도 실질적인 자유를 얼마나 많이 구속하는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서 이긴 놈이 최고가 된다는 건데, 처음부터 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길 수 있다는 건가. 이런 의미에서 자유라는 말은 달갑게 인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유인'이라고 하면 달라진다. 참 근사한 단어다.  

'자유인'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내가 객관적인 나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때다. 내가 나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과 같다. 예수나 석가가 그런 자유인의 경지에 올랐던 사람일 텐데, 우리는 그 경지가 불가능하고(웃음), 죽을 때까지 그 경지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삶이란 자기라는 객체를 자기라는 주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 그런 자유인을 희망하면서 죽어가는 것 같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 및 정리는 비례대표제포럼 손어진 간사와 정치경영연구소 조경일 연구원이 담당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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