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주기 추모집회가 ‘태극기 소각’ 논란으로 뒤덮였다. 지난 18일 열린 세월호 추모집회에서 한 남성이 태극기를 불태웠고, 몇몇 언론이 이를 보도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경찰은 수사를 진행 중이다. 그러나 법으로 처벌하기 어려우며, 태극기 소각을 국가 모독이라 보는 것이 과장된 해석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조선일보는 20일 1면에 <태극기 불태운 시위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한 남성이 태극기를 불태우는 사진을 실었다. ‘뉴스1’이 찍은 사진이었으나 뉴스1에게 제공받은 사진이 아니라 채널A가 방송한 뉴스1 사진을 캡처한 것이었다.
언론은 일제히 태극기를 불태우는 행위가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고, 세월호 집회가 변질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경찰은 채증자료를 바탕으로 남성에 대한 추적수사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 4월 20일자 조선일보 1면 | ||
“이 정도면 '반(反)대한민국' 수준이다. 7년 전 괴담을 앞세워 이명박 정부를 흔들던 '광우병 광풍'을 상기시킬 정도”(20일자 문화일보 사설)
“정부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행위다. 세월호 추모집회가 갈수록 불법 폭력시위로 변질되는 조짐이다”(21일자 중앙일보 사설)
“세월호를 빙자해 국기를 뒤흔드는 단골 시위세력의 대한민국 모독 행위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가”(21일자 동아일보 사설)
새누리당도 연일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20일 국회 현안보고에서 “성완종 리스트에 눈 팔린 사이에 태극기가 불타고 있다”며 “태극기를 불태운 것은 대한민국을 불태운 것이다. 이걸 방치하면 그게 국가냐”고 비판했고,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21일 선거대책회의에서 “책임 있는 사람들에 대해 엄정히 처벌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고, 이군현 새누리당 사무총장 역시 “자국의 국기를 불태우는 것은 살아있는 부모를 불태우는 거나 똑같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추모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서도 태극기를 소각한 행위가 적절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다.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것. 한 블로거는 블로그에 '태극기를 태운 이 사람을 수배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국면전환을 꾀하려는 역공작으로 의심된다”는 것.
태극기를 불태웠다는 이유로 처벌이 가능할까.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국기모독죄’를 언급했다. 형법105조에는 ‘국기, 국장 모독죄’가 있다.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 또는 국장을 손상, 제거 또는 오욕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2012년 12월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 앞에서 열린 야간유세를 마치고 퇴장한 가운데 부근 재떨이통에 버려진 지지자들의 태극기가 보인다. ⓒ민중의소리 | ||
문제는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을 입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태극기를 불태운 남성은 21일 슬로우뉴스와 인터뷰에서 ‘왜 태극기를 태웠나’라는 질문에 “집회에 참석했다가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경찰이 공권력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조차 막고, 최루가스, 마구잡이 연행… 화가 났다”며 “우연히 종이 태극기를 현장에서 주웠고, 무자비한 공권력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해서 태웠다”고 밝혔다.
이 남성은 또한 “국가나 국기를 모욕할 거창한 의도는 전혀 없었다”며 “공권력을 함부로 남용하는 권력자들, 당신들은 태극기를 가질 자격이 없다,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답했다.
이 남성의 말대로라면 이 남성이 태극기를 불태운 이유는 공권력에 대한 반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태극기를 가져간 것이 아니라 현장에 있던 종이 태극기를 태웠다는 점에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조성대 한신대학교 교수는 21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동기가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보다는 정부정책 비판 쪽에 더 가깝지 않나 싶다. 또한 불법행위를 선동한다기보다 감정적인 분노를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실제 이 남성은 태극기를 불태우기 전에 구호를 외치거나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고 소각 뒤 그냥 사라졌다고 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이광철 변호사는 “이 사례는 대한민국을 모욕했다기보다 대통령이나 정부의 대응에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이기에 무죄를 받는 것이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행위의 목적을 엄밀히 따지지 않을 경우 오남용이 예상된다. 태극기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는다면 월드컵 때 태극기를 오려 옷으로 만들어 입거나 시민단체들이 집회를 마친 뒤 태극기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는 행동도 처벌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는 “법원이 ‘목적’을 마음속으로 모욕을 결심한 ‘확정적 인식’으로 볼지 ‘모욕할 목적도 있지 않았겠나’는 식의 ‘미필적 인식’으로 볼 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한국축구대표팀이 토고와 독일월드컵 경기를 가진 2006년 6월 13일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응원전을 마친 시민들이 응원도구로 사용한 태극기를 쓰레기와 함께 버린 모습. ⓒ연합뉴스 | ||
태극기 소각도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수용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1984년 텍사스 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성조기를 불태운 시위자의 행동을 표현의 자유라 인정한 사례가 있다.
조성대 교수는 “연방대법원 판결 이후 연방의회가 성조기보호법을 통과시키지만 바로 그 날 미국 시민들이 성조기를 불태워버렸다. 90년 연방대법원이 다시 성조기 소각을 금지하는 법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며 “정부정책을 비판할 목적으로 상징적인 의미에서 태극기를 태우는 것은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 보호되어야 하며, 국가가 처벌하려 한다면 대한민국을 모독할 목적인지 매우 과학적으로 입증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광철 변호사는 “‘모욕할 목적’이 인정되더라도 법원이 표현의 자유로 인정할 수 있으며 형사 처벌의 값어치가 없다고 보면 위법성 조각사유로 판단할 수 있다”며 “보수 세력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 부르는 미국도 표현의 자유임을 인정했다. 형사 처벌하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정부여당과 보수언론이 실제 처벌이 어려움에도 태극기 소각을 부각시켜 세월호 집회에 대한 여론의 반감을 부추기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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