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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pril 30, 2015

대미외교 패배 박근혜, 미국과 일본이 붙으면 한국은 불행해진다 [게릴라 칼럼] 미일동맹과 한민족의 운명, 그 지난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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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락 오바마(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의 백악관에서 회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미일동맹이 한층 더 격상됐다. 27일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으로 자위대의 활동 범위에 대한 제한이 풀린 데 이어, 28일 아베 신조 총리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미국과 함께 대(對)중국 견제에 박차를 가하고 미국은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후원하게 됐다. 

미국이 '전과자' 일본에 무슨 권한으로 그렇게 강력한 경찰권을 쥐어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세계 최강 미국은 자국의 세계 패권을 연장하겠다는 의도로 일본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우리로서는 미일동맹의 격상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줄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과 미국이 국교를 맺은 1854년 이후의 160년 역사를 살펴보면, 두 나라의 관계가 단순히 두 나라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라 제3자인 우리 한민족에게도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불행히도, 두 나라의 관계가 유별나게 좋아질 때마다 우리가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두 나라의 동맹 격상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미일동맹 강화, 한민족에 부정적 영향 

1854년에 일본은 동아시아 기지를 모색하는 미국에 시장을 개방했다. 이 해에 일본과 미국의 화친조약이 체결됐다. 이를 발판으로 미국은 조선을 개방 시키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미국의 요구를 단호히 외면했다. 이런 상태에서 1866년에 미국 선박 제너럴 셔먼호가 상선을 가장해서 평양 대동강에 침투했다. 그리고 훗날 개화파 선각자로 유명해질 평양감사 박규수가 관내 백성들과 함께 이 침략선을 격침시켜 버렸다. 

그러자 1871년 미국은 보복 차원에서 '신미양요'라는 침략전쟁을 도발했다. 이때 미국 아시아함대는 일본 나가사키에 있다가 조선을 향해 출정했다. 미국이 일본 항구를 이용해서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미일화친조약이 미국의 조선 침공에까지 도움이 된 것이다. 일본과 미국의 제휴가 조선에 부정적 작용을 미쳤다. 

유사한 현상은 1900년을 전후한 시점에도 일어났다. 미국은 1865년 남북전쟁 종결을 계기로 국민통합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어 1886년에 인디언들과의 전쟁을 사실상 마무리함으로써 미국 땅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됐다.

그러자 미국은 1890년대에 대대적인 태평양 공략에 나섰다. 미국 땅에 이어 태평양 섬들을 차지하기 위한 행동에 나선 것이다. 미국은 1898년에는 하와이·필리핀·괌을 강점하고 1899년에는 사모아·웨이크섬을 강점했다. 이로써 태평양 곳곳의 주요 거점을 확보하게 됐다. 미국 땅보다 훨씬 더 넓은 태평양 바다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1900년 전후의 미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새로 확보한 태평양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 혼자의 힘으로는 벅찬 일이었다. 누군가의 협력이 필요했다. 그런 미국의 머리에 떠오른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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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의 조선시대 해안기지인 광성보에 있다.
ⓒ 김종성

1904년, 조선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벌였다(러일전쟁). 이 전쟁은 1905년 들어 일본의 승리로 굳어졌다. 그러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제26대 미국 대통령(재임 1901~1909)은 이것을 기회로 봤다. 러시아와 일본의 평화협상을 중재하는 기회에 일본과의 협력 강화를 모색하고, 이를 통해 태평양 지배에 대한 일본의 협조를 얻어내고자 했다. 

이렇게 미일이 유착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 그 유명한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육군장관이 도쿄에서 체결한 이 밀약의 핵심은,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에 협조하고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에 협조한다는 것이었다. 

이 밀약을 통해 미국은 필리핀을 포함한 태평양 지역에 대한 자국의 권익을 안정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대가로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이에 힘입어 일본은 1905년 연말에 을사늑약(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조선 강점에 한층 더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미일의 협력 강화가 을사늑약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이듬해인 1906년 12월 10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비(非)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러일전쟁의 종결에 기여했다는 게 수상 이유 중 하나였다. 그가 러일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그의 중재를 수용했기 때문이고, 일본이 그의 중재를 수용한 것은 그가 일본의 조선 강점에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최초의 노벨평화상은 미국이 일본의 조선 강점에 찬성했기 때문에 나왔다고 볼 수도 있다. 

1900년대 초반의 미일동맹 강화는 이처럼 우리 한민족의 운명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미일이 가까워지면 한국이 불행해진다는 사실이 한층 더 분명해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 조선에서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거족적인 3·1운동이 발생했다. 일본이 이 운동을 진압한 뒤인 1921년, 미국은 일본에 한층 더 큰 힘을 실어주었다. 일본·영국·프랑스와 함께 이른바 워싱턴체제를 구축하여 태평양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한층 더 공고히 한 것이다. 이 덕분에 일본은 미국·영국·프랑스와 더불어 세계 주요 강대국의 위상을 얻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에 한민족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착취는 한층 더 심해졌다. 

일본에 떨어진 미제 핵폭탄, 한민족의 해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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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인 덕수궁 중명전. 지금은 덕수궁과 따로 떨어져 있다.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있다.
ⓒ 김종성

미일이 가까워지면 한민족이 불리하다는 것은, 거꾸로 하면 미일이 멀어지면 한민족이 유리하다는 뜻이 된다. 미일이 멀어지면 한민족이 유리해진다는 사실은 1931~1945년의 역사를 통해 드러났다. 

1931년에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과 만주를 독점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됐다. 이로 인해 1941년에는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어제의 친구였던 두 나라의 전쟁은 미제 핵폭탄 두 방의 투하로 끝이 났다. 그러고 나서 한민족은 해방됐다. 이 해방은 한민족의 독립투쟁 덕분이기도 했지만, 미제 핵폭탄 두 방 덕분이기도 했다. 이렇게 미일관계가 험악해진 게 원동력 중 하나가 되어 한민족은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됐다.

그런데 핵폭탄 투하 후 미국과 일본은 금방 다시 가까워졌다. 미국은 금세 일본과 손잡고 소련·중국 견제에 나섰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민족의 분단이 고착되고 남한에서의 친일 청산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래서 한국은 일본을 상대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할 기회를 얻기는커녕 일본에 경제적으로 예속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미일이 다시 가까워지면서 한민족이 불이익을 입은 것이다. 

이런 몇몇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난 160년간의 중간 중간에 있었던 미일동맹 강화는 두 나라한테는 일미(一味)의 경험이었을지 모르지만, 우리 한민족한테는 쓰디 쓴 악몽이었을 뿐이다.

미일이 가까워지면 한민족이 불행해지는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일본은 한국을 억누르는 데서 자국의 활로를 찾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세계 최강과 가까워지면 질수록 한국은 더욱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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