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합의체서 이례적 13대 0 완파… 상고법원 고려했거나 정치적 줄타기 가능성
국가정보원이 해킹 프로그램을 사들였다고 떠들썩하던 지난 7월 15일. 오전부터 서울 서초동 대법원 주변에 소문이 돌았다. 다음날 있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선거에 불법으로 개입한 사건 재판이 뒤집힐 것이라는 얘기였다. 기자는 이날 대법원의 선고 방향을 가늠해 보려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을 종일 오갔다. 파기된다는 분위기는 확실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파기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16일 대법원은 전원합의체로는 이례적으로 13대 0으로 완파했고, 그것도 사건의 실체도 아닌 증거능력을 문제삼아 파기했으며, 그러면서도 원세훈 전 원장에 대한 보석 신청은 불허했다. 변호사들조차 결과적으로 유죄인지 무죄인지, 판결이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이제 원세훈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해킹 국면을 지나 내년 총선까지 지나서야 선고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법률 전문가의 손을 거치면서 부호화되고 암호화돼 있다. 판결문을 읽어봐도 무슨 소리인지 알기가 어렵다. 뭔가 테크니컬한 문제가 있었다고 막연히 이해할 뿐이다. 하지만 대법원의 선고는 수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으며, 뚜렷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의심할 정황이 깊게 들어 있는 미스터리 판결이다. <주간경향>은 이 사건이 가진 불투명한 요소에 대해 의심하면서 추적했다.
우선 사건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국가정보원법 위반 사건의 항소심이 잘못됐다며 파기하고 다시 재판하라고 했다. 대법원이 문제 삼은 것은 항소심에서 증거능력을 인정한 텍스트(txt) 파일 2개다. ‘시큐리티’와 ‘425지논’이라는 제목이다. 두 파일은 국정원 직원이 쓴 메일에 첨부돼 있었다.
‘425지논’에는 인터넷에서 국정원 직원들이 유포할 이슈와 논지 관련해 활용할 기사가 있었고, ‘시큐리티’에는 국정원 직원들이 사용한 것으로 의심되는 트위터 계정들이 적혀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파일들을 기초로 검찰이 주장한 트위터 계정 1257개 중 716개를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이 사용·관리했다고 인정했고, 이 716개의 트위터 계정이 트윗·리트윗한 글 27만4800개를 국정원의 사이버활동으로 파악했다. 대법원은 두 파일에 대한 증거능력을 부정했다.
대법관 수는 법원조직법 4조 2항 규정에 따라 14명이다. 헌법재판관은 9명이라고 헌법 111조에 정해져 있는 것과 다르다. 그래서 대법관 수는 국회가 마음만 먹으면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 대법관 14명 가운데 일상적으로 재판하는 사람은 12명이다. 대법원에는 4명으로 구성된 소부(小部)가 3개 있다. 소부는 전원일치를 해야만 한다. 전원일치가 되지 않으면 전원합의체(전합)로 간다. 소부에 소수의견이 없는 이유다.
대법관 14명 가운데 1명은 대법원장인데, 대법원장까지 13명이 재판하는 기구가 전합이다. 전합은 다수결 시스템이다. 이것이 바로 소부는 4명으로 짝수이고, 전합은 13명으로 홀수인 이유다. 전합은 예외적으로만 열린다. 지난해 전합은 14건으로, 전체 사건의 0.03%였다. 전합을 연다는 것은 대법원이 작심했다는 것이다. 전합 판결은 법률을 만드는 효과로 사회를 뒤흔든다. 물론 법원조직법에는 ‘전합이 원칙, 소부가 예외’라고 돼 있지만 오래 전에 상황이 뒤집혔다. 참고로 나머지 대법관 1명은 행정을 전담하는 법원행정처장이다.
그래서 전합 판결에 소수의견이 없는 것은 이례적이다. 대법원 공보관실을 비롯해 공식라인에서는 틀에 박힌 반박을 내놓는다. “소부에서 합의가 안 되는 경우 이외에도, 판례를 변경해야 하는 경우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은 전합에서 한다.” 하지만 외교적 파문을 일으키고 학계에도 커다란 논란을 일으킨 2012년 ‘미쓰비시 징용배상’ 판결도 소부 판결이었다. 원세훈 사건도 전합일 수는 있다. 하지만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전직 대법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렇다. “이번에 대법원이 파기했다는 이유가 증거능력에 관한 것인데, 그런 걸 전원합의로 선고할 필요가 있나 싶다. 소부에서 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어서 전합에서 했다고 주장하기에는 그 이유가 실체가 아닌 증거능력 문제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결과적으로 이번 판결은 전합에서 할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따져보자.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박주민 변호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증거능력 여부를 판단하는 일은 변호사·검사는 물론이고 판사에게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이 그걸 해결하겠다고 전합을 열었는데 전원일치 결론을 나왔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법원 판결의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는 점이다. 항소심 판결문을 봐라. 꼼꼼하고 정밀하다. 대법원이 그걸 깨려면 더 낫지는 않아도 비슷한 수준의 근거는 대야 한다. 그런데 단편적이고 빈약한 근거에 불과하다. 그리고 13명이 동의했다. 이번 판결의 배경과 과정에 의심이 그치지 않는 이유다.”
박 변호사가 말한 서울고법의 판결문은 247쪽에 이르는 내용 가운데 증거능력 부분만 72쪽 분량이다.
그래서 서초동 주변에서는 “대법원 판결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조악하다. 당초 반대의견이 있는 무죄 판결문을 써놓았다가 막판에 증거부분만 추려서 선고한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나온다. 증거능력으로 범위를 좁혀서 전원일치 합의를 이끌어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는 “근본적으로 증거를 엄격하게 보자는 대의에 반대할 대법관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대법원이 증거를 거의 다 날려버리고도 원세훈 전 원장이 신청한 보석은 기각한 것은, 유·무죄를 판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선전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다른 의문이 든다. 이런 판결로 대법원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원세훈 전 원장에 대한 항소심 선고가 지난 2월 9일이었으므로 이미 한 달 이상 늦은 상황이었다. 여기에 주심 민일영 대법관은 9월 퇴임이어서, 선고를 8월로 넘길 경우 후임 손에 들어가면서 자칫 연말까지 미뤄지는 게 불가피했다. 이 경우 비난은 불보듯하다. 따라서 대법원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사건을 선고한 셈이다. 그리고 이 무렵 해킹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점이지만 피하지 못한 것은 이런 이유가 크다.
오히려 서초동 일대에서는 다른 수식을 내놓는다. 이번에 기존 항소심 판결이 파기됐으므로 새로 항소심을 해야 하는데 데드라인은 6개월, 2016년 1월 16일이다. 그러고 나면 다시 대법원에 오는데 다음 데드라인은 같은 해 4월 16일이다. 그런데 이 선고시한 직전인 4월 13일에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진다. 중소로펌 어느 변호사의 말이다. “우리야 대법원 내부를 모르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다. 하지만 선고가 나고 변호사들 여럿이 모여서 다음 선고 시점까지 시간을 벌었다는 말들은 했다. 대법원 선고시한이 총선 직후 아닌가. 더 이상은 추측에 불과해 말하지 않겠다.”
일부에서는 대법원이 현재 추진 중인 상고법원을 관철하기 위해 여야 어느 쪽에도 밉보이지 않을, 이도저도 아닌 맹탕 결론을 냈다고 본다. 다른 사건 같았으면 미루고 미뤘을 텐데, 처리시한이 정해진 선거법 사건인 데다 주심까지 퇴임이 임박해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관들 가운데도 일부는 상고법원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는데, 대법관들이 소신을 꺾어가며 대법원 추진 사업을 미뤄줬을 가능성은 적다”는 이야기도 적지 않다. 그밖에 “대법원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임을 의식해, 정치적으로 선고 시기를 미룬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아무튼 7월 16일이라는 선고 시점은 이런 맥락이 있다.
처음으로 돌아와서 지금껏 살펴본 세 가지 의문의 고리를 연결해보자. 여러 법률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런 의심이 든다. 이 사건 대법원 판결문은 전원합의체에서 그것도 13대 0으로 처리할 일은 분명히 아니었다. 이 정도 수준의 쟁점은 처음부터 소부에서 하는 것이 맞고 전합에서 논의했더라도 결론이 13대 0이므로 소부에 돌려줘 선고토록 하는 게 관례다. 그럼에도 13대 0으로 선고한 이유가 있다. 증거능력에 대한 판단은 대법관들의 최대공약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13명의 대법관들은 다양한 측면에서 원세훈 사건을 논의했고 초기단계에서 의견도 갈렸지만, 결국은 정치적 어려움 또는 막바지에 터진 해킹 논란을 의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논란을 넘어서기 위해 전원 합의가 가능한 최대한의 수준으로 판결문을 작성해놓고 합의를 도출했을 가능성이다. 그리고 대법관 13명 전원의 사인으로 여론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대법원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상고법원에 대한 여야의 반대를 막기 위해서이거나 정치적 상황을 의식해서다.
의문의 핵심은 결론 부분이다. 상고법원을 위해서이거나 정치적 논란을 회피하기 위해, 대법원이 이런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물론 대법원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기에 퍼즐을 맞춰본 것이지만 적잖은 법조인들이 합리적으로 추측하는 내용이다. 대법원이 추진하는 상고법원은 대법원을 정책법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정책법원은 정치적이고 정책적인 문제를 전담한다. 헌법재판소와 비슷한 수준의 일에 집중하고, 대여금 같은 자잘한 사건은 상고법원에 보내는 식이다. 상고법원이 도입된다면 대법원은 이른바 정책법원의 역할을 하는데, 선거법 사건은 정책법원이 다뤄야 할 재판 가운데 가장 낮은 수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법원은 원세훈 판결 같은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시기를 미뤄가며 정치적으로 조율을 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도입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책법원이 무엇인지 대담하게 보여주는 것이지, 정치적으로 줄을 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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