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골적이다. '오만하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2012년 '경제 민주화'와 '복지 정책'을 내걸고 중도층을 흡수해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정책은 사실상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27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이 당정협의에서 밝힌 2016년 예산안 편성 방향은 좌표 잃은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과 5개월 전만 해도 2016년 예산안의 키워드는 '재정 개혁'이었다. 최 부총리는 지난 4월 1일 재정정책자문회의 민간위원 간담회에서 내년도 예산은 "제로베이스 예산 방식과 보조금 일몰제를 엄격히 적용하겠다"며 '재정 개혁'을 키워드로 내세웠다. 성과가 미흡한 사업은 과감히 페지하거나 대폭 삭감하는 등, 정부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고 있는 상황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그런데 5개월 후 모습을 드러낸 내년도 예산안의 윤곽은 '재정 개혁'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예산 규모는 400조 원에 육박하고, SOC 예산도 줄지 않았다. 관련해 "어느새 경제 정책의 목표가 '총선'이 됐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최근 최 부총리가 위험 수위를 넘나드는 발언을 연일 쏟아내는 것도, 이같은 분석과 무관치 않다. 경제 정책 분야에서 박근혜 정부는 '원칙'을 폐기하고 출범 2년 반만에 '방향 잃은 배'가 됐다.
대통령 공약은 안중에도 없어…오로지 '총선'만 보고 간다?
많은 학자들은 경제에 대한 기대 심리가 집권 세력의 지지율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주는 것, 이것이 여권 선거 전략의 핵심이 된다. 반면 야권은 여권의 실패를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지지율을 쟁취한다.
지난해 2월 한국경제학회에서 발표된 '거시경제와 대통령 지지율' 논문에 따르면 역대 모든 대통령의 지지율에는 경제전망 변수와 코스피가 한결같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대통령 지지율과 선거 결과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있다. 상황에 따라 변수도 많다. 각종 정치적 변수를 차치한다면, 경제에 대한 기대 심리를 부추기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선거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여겨진다.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지난 2012년 대선의 핵심 전략 참모(물론 중도에 '비선 논란'으로 사퇴하긴 했다) 중 하나였던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지난해 여당의 7.30 재보선 승리 후 "제가 취임하자마자 41조 원 규모의 재정정책을 과감히 내놨다. 솔직히 말해 재보궐선거 때 재미 좀 봤다"고 고백한 것은 이런 '공식'이 실질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재정 확대 정책은 여권에 매력적인 카드다. 내년 총선까지 8개월 남았다. 다시 한번 '재미'를 추구하자는 것 같다.
내년 예산은 무려 400조 원 규모에 육박할 전망이다. 지난 25일 새누리당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내년에는 잠재성장률 수준인 3% 중반 정도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해서 여러 가지 (당의) 총선 일정 등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해 공무원 선거 중립 위반 논란을 일으킨 최경환 부총리는, 27일 오전 당정협의에서 "지난 추경(추가경정예산)으로 형성된 경기 회복의 모멘텀이 유지될 수 있도록 재정 건전성이 크게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재정을 확장적으로 운용하려 한다"고 했다.
지난 4월에 내놓은 "재정 개혁" 발언과 비교해보면, 기조가 확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하루 간격을 두고 나온 최 부총리의 발언을 이어보면, 정부의 재정 확대 정책의 목표가 '총선 일정'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 즉 돈을 풀어 유권자의 기대 심리를 한껏 올려 놓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발언은 논란이 됐는데, 최 부총리의 태도는 오히려 당당하다. 그는 이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제 발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선거법과 관련된 부분은 어디서 어떤 의도로 이야기했는가가 중요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3선 관록의 선거 전문가이자 박근혜 정부 실세 정도면, 선거법 위반 관련 검토는 이미 끝났을 것이다. 물론 선관위에 던지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일 수도 있다.
일단 돈을 풀기로 결정한 만큼, 어디에 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게 됐다. 그러다보니 박 대통령의 공약에 배치되거나, 현 남북관계 상황을 거스르는 예산 편성 방침이 툭툭 쏟아져나온다.
최 부총리는 "SOC는 공공과 민간 투자를 포함해 전체 규모가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SOC 투자를 줄이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과 배치된다. 최 부총리는 또 "DMZ 접경 지역의 전투력과 대잠수함 전력을 강화하는 등 국방비 투자를 증액"한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최근 남북관계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분히 유권자를 의식한 다목적 포석으로 해석된다.
여기에 더해 나온 것이 정부의 사치품 감세 정책이다. 특히 명품 시계, 보석, 명품 가방 등 사치품에 대한 개별 소비세 감세 정책 등은 조세 형평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와 함께 박 대통령은 대기업 총수 사면을 통해 기업 투자에 대한 기대감도 부풀려 놓았다.
취임 초에 내건 국정 기조나 국정 철학에 상관없이, 철저하게 '집토끼'를 바라보고 국가 정책을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 자체가 마치 거대한 총선 전략의 집행자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여기에 더해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은 새누리당 의원 연찬회에서 "총선 필승"을 외쳤다. "반드시(必) 승리하라(勝)"는 결의가 '덕담' 수준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이 별 문제가 안된다면 정 장관은 야당 국회의원을 전부 모아놓고 "총선 필승"을 똑같이 외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승리감'에 도취된 새누리당?
정부의 이같은 전폭적인 지원에 새누리당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26일, 새누리당 의원들은 계획된 연찬회를 다 마치지 못한채 박 대통령의 부름에 즉각 응했다.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갑'의 위치에 오른 청와대와 '을'이 된 새누리당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청와대 오찬 자리에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대통령님, 오늘 기분 좋은 날입니다"라고 운을 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제는 대통령 임기 반환점을 도는 날이었는데 의원들 모두 모여서 대통령의 전반기의 성공적인 국정 수행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이제 남은 임기 반 동안 앞으로 미래 세대들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날을 만들기 위해 대통령님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4대 개혁을 새누리당에서 반드시 뒷받침을 잘해서 꼭 성공해서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다 앞장서자 다짐을 단단하게 했습니다."
김 대표는 한때 'KY라인'으로 불렸던 '동지'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숙청하는 데 총대를 맸다. 이후 김 대표의 태도는 바뀌었다. 전당대회 당시 "청와대에 할 말은 하겠다"고 했던 약속은 뒷전이 됐다. 이유는 분명하다. 김 대표는 '대통령의 심기'가 당의 총선 전략에 중요한 변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정치적 스승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총재의 관계는 그에게 반면 교사다. 이 전 총재는 1997년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과 선을 그었고, 이는 대선 패배의 한 요인이 됐다.
이미 승리에 취해있는 듯한 모습의 여권 안에는, 이제 견제 세력이 없다. 2012년 취임 당시 대통령의 약속을 돌아보고 '경제 민주화의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의원도 없다. 견제 세력이 없으면 오만해진다. 새누리당은 과연 내년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물량 공세'의 효과는 상당히 좋긴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또한 생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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