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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ugust 28, 2015

[월드리포트] 장쩌민, 그는 친일파였다

1926년 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인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는 2002년 말 공식적으로 권좌에서 내려온 지 10년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톈안문 사태 이후 위기에 몰린 덩샤오핑에 의해 발탁돼 초고속으로 최고 자리에 올랐던 장쩌민은 은퇴 후에도 중국 권부의 최대 파벌인 상하이방의 거두로서, 공청단 출신의 후진타오를 거처 태자당 계열의 시진핑 주석으로 격세의 권력 이양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태상왕 소리를 들어가며 기세등등하던 그였지만 시진핑 집권 이후 반부패 개혁의 칼날이 그의 측근들에게 집중되면서 장쩌민도 곧 험한 꼴을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몇 년 전부터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장쩌민 사망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진위 여부를 파악하느라 특파원들은 진땀을 흘렸지만 중국 당국이나 관영 언론들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날 때 쯤이면 건재한 장쩌민의 사진이나 행사 참석 소식이 흘러나오곤 했습니다. 양치기소년도 아니고 거듭되는 헛소문 해프닝에 이골이 났건만 이번 주에는 장쩌민 체포 사진이라면서 SNS에 올라 온 한 장의 사진이 또 베이징 언론가와 외교가를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사실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사진상에 장쩌민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곤색 두터운 춘추복 점퍼를 입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워야 지난 이른 봄이라는 얘기인데 그 후로 벌써 여름 지나 4, 5개월은 지났을 텐데 전직 국가주석이 정말 체포된 상황이라면 이렇게 장시간 동안 관련 내용이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장쩌민의 얼굴이나 풍모를 봐도 대략 10년 이상 전인 주석 재임시절 모습으로 보여 고령에 병약해진 지금의 모습과 비교해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상무위원이었던 저우융캉이나 쉬차이허우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 고위직 비리연루자들에 대해서도 체포 모습을 철저히 통제하고 사전에 치밀히 정지 작업을 거쳐 혐의 사실과 처벌 수위를 단계별로 언론에 흘려 온 전례로 비춰 최고 권력이었던 장쩌민에 대한 처리치고는 너무 허술하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곧이어 이 사진의 출처가 '대기원공보'라고 중국 정부가 사이비종교 및 이적 단체로 규정한 파룬궁이 운영하는 매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해외로 망명했거나 지하에서 활동중인 파룬궁 관계자들은 자신들을 탄압했던 장쩌민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어 이 사진이 의도를 가지고 조작됐을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주목해야 될 점은 후진타오 전 주석이나 리펑 전 총리 등 다른 전직 최고 지도자들에 비해 유독 장쩌민의 신변에 대한 악성 루머가 많이 양산되고 있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장쩌민이 이 정도로 중국 안에서 비호감 인물로 꼽히는 건 그가 덩샤오핑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톈안문 사태 이후 중국의 비 민주적인 강압 통치를 이끈 인물이며 그의 자식들과 일가친척들이 권력형 축재를 일삼았다는 사실외에도 그와 그의 가계가 의심받고 있는 친일 이력도 무관치 않습니다.

장쩌민의 친부인 장스쥔(江世俊)은 일본군이 중국 대륙을 유린했던 1930, 40년대 친일 매국 활동을 했던 인물입니다. 1940년 11월 난징에 매국노 왕정위(汪精衛)를 수반으로 한 일본 괴뢰정부가 들어서자, 장스쥔은 장관첸(江冠千)이란 가명으로 바꾸고 난징 정부에 몸을 의탁합니다.

난징의 왕정위 괴뢰정부에서 선전부 부부장 겸 사론위원회 주임 위원을 역임하면서 '중화일보' 주필 후란청(胡蘭成)의 오른팔이 됩니다. 후란청은 당대 최고의 매국 작가였는데 후란청은 훗날 고국을 탈출해 일본에 머물며 '역사의 소용돌이'란 책을 냈습니다. 그 책 속에는 장쩌민의 부친인 장스쥔(江冠千)과 함께 일을 한 내력이 소상히 기록돼 있습니다. 장스쥔은 '매국질'을 하며 축재한 돈으로 아들인 장쩌민을 학비가 비싸기로 유명했던 양저우(楊州) 중학을 거쳐 왕정위 괴뢰정부가 세운 중앙대학에서 공부시켰습니다.

신중국 성립 이후 신분을 세탁해 공산당 간부의 길로 들어선 이후 장쩌민은 철저히 부친을 지웠습니다. 공석이고 사석이고 불문하고 친아버지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이 당 총서기로 있을 때는 친형제자매와도 내왕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후견인이자 실질적인 최고권력이었던 덩샤오핑이 1997년 세상을 뜨고 당, 군, 정 삼권(三權)을 잡게 되자 장쩌민은 양저우에 가서 조상의 제를 지내고 조상의 무덤을 재건하는데 국고 150만 위안을 썼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전문 집필 팀을 꾸려 자신의 전기를 쓰게 했습니다. 집필 팀은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지만 대중들을 감복시킬 수 있는 정치 업적을 찾아낼 수 없었고 오히려 부친의 친일 전력과 정쩌민의 가계 이력 위조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치부들만 드러나게 됐습니다. 장쩌민은 불같이 화를 내며 집필 팀을 즉각 해산시켜버렸습니다. 하지만 잠깐 사람들의 입을 막고 귀와 눈을 가릴 수 있지만 결국 추문은 흘러나가게 마련입니다.

우리 국민 못지않게 반일 감정과 일제 콤플렉스가 심한 중국인들에게 친일 매국노로 단정되는 순간 공공의 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만일 그게 고위 권력자라면 친일 이력이 드러난 그 개인 뿐 아니라 공산당과 정권 자체의 정통성조차 뿌리째 흔들릴 수 있습니다.

장쩌민이 권좌에서 물러난 지 5년이 더 지난 지난 2009년 12월 뤼자핑(呂加平)이란 학자가 장쩌민 부친의 수치스러운 이력을 폭로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장쩌민의 매국 2건, 거짓 2건(二奸二假)'이란 제목의 공개서한을 발표했습니다.

장쩌민 본인과 그의 친부 모두 일본의 괴뢰 매국노로 이것이 첫 번째 매국이요, 신 중국 성립 후 장쩌민이 러시아 스파이로서 KGB에 충성을 다했으니 이것이 두 번째 매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두 가지 거짓이란 장쩌민이 1949년 이전에 중국 공산당 지하당에 가입했다고 속였고 자신이 중공이 추앙하는 '열사' 장상칭의 양자인 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 정부의 통제 속에서도 입소문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중국인들은, 장쩌민을 최고 통치자로 받들어 온 10여년을 수치스러워했고 장쩌민의 본 모습을 발가벗기듯 낱낱이 밝혀내야 한다는 분위기도 생겨났습니다. 장쩌민은 강력히 반발했고 후진타오 주석 등 당시 지도부에 뤄자핑에 대한 처벌과 소문 차단을 요구했습니다. 신속히 차단하지 않으면 자칫 중국 최고 권부가 공멸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2010년 9월 뤄자핑은 연기처럼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중국 정부가 항일전승 70주년 행사를 거국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난데없이 장쩌민 체포설이 나온 배경을 이제는 조금 이해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SNS에는 이 사진의 진위에 대한 갑론을박 못지않게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권세를 누리고 있는 친일 세력들을 골라내 쓸어 버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습니다.

체포설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어제 중국 언론엔 장쩌민이 9월 3일 톈안먼 광장에서 열리는 기념식과 열병식 행사에 불참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설명도 붙어 있었습니다. 장쩌민 스스로 자숙과 반성의 시간을 갖기로 한 건지 아니면 시진핑 정부가 친일 논란의 중심에 있는 장쩌민의 행사 참석을 원치 않았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며칠 전에는 장쩌민의 휘호가 적힌 거석이나 머릿돌들이 중앙당교 등 중국 기관에서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는 기사도 실렸습니다. 중국 정부의 주도하에 장쩌민 흔적 지우기가 시작된 겁니다. 머지않아 마주하게 될 장쩌민의 죽음 앞에 중국인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중국의 역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광복 70년' 이 옳으냐 '광복 96년'이 맞느냐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깨끗이 청산 못한 친일 과거사는 미완의 과업으로 남아 있습니다. 역사에서 if! 가정을 논하는 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지만 만일 우리 역사에 주어졌던 몇 번의 천금같은 기회를 제대로 살렸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부당함과 사회적 부조리의 뿌리를 도려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공허한 안타까움을 곱씹어 봅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리 늦지는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임상범 기자doongl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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