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함지뢰 도발과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그리고 포격까지. 연이은 남북 간 갈등이 남북 고위급회담을 통해 마무리됐다. 정치권과 여야를 가리지 않고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번 포격 사건은 박근혜 정부 하에서 벌어진 최대의 남북 간 군사위기였고, 이를 대화로 수습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미디어오늘이 포격사건과 남북 고위급회담 과정에서 드러난 남북관계의 시사점 6가지를 정리해봤다.
1. 아무리 ‘강경대응’ 외쳐도 결국 답은 대화뿐
1. 아무리 ‘강경대응’ 외쳐도 결국 답은 대화뿐
보수파의 대북정책은 ‘원칙’으로 대표된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이 먼저 핵을 폐기하면 경제성장을 시켜주겠다는 ‘비핵개방 3000’을 내세웠다.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역시 북한이 변하면 남북관계가 진전될 수 있다는 ‘대북원칙론’을 전제로 한다.
북한이 변화할 조짐을 보이지 않고 도발을 일삼으면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대북강경책’이다. 대북강경책에는 한국 정부가 강경하게 원칙에 따라 대응하면 북한이 변화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번 포격 사건은 대북강경책에 실체가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줬다. 박근혜 대통령과 국방부는 ‘원점 타격’ ‘선조치 후보고’ 등을 언급하며 단호한 대응을 강조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가차 없이 응징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제안한 고위급 회담에 대해서도 새누리당은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 21일 서울 광화문 주변에서 대한민국어버이연합, 보수국민연합 등 보수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북한의 포격도발에 강력히 응징하자는 내용의 집회를 열고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사진을 붙인 상징물을 태우고 있다. ⓒ연합뉴스 | ||
그러나 군은 원점타격을 하지 못했고, 정부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제안했던 ‘고위급 회담’을 통해 사태를 수습했다. 말로는 대북강경책을 내세우고 전쟁불사를 외쳐도 남북 간 갈등이 고조될 때 결국 대화 외에는 묘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남문희 시사IN 한반도전문기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에서 “이 정부가 보수정부 대북 강경책의 진면목을 과연 보여줄 것인가,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묘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지켜봤다”며 “그런데 다른 게 아무것도 없었다. 원점 타격? 선(先)조치 후(後)보고? 조선일보가 밖에서 뭐라고 하건 그 자리에 있는 한 용빼는 재주가 없다는 것을 다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겉으로는 단호한 대응, 강경대응을 외치며 대화에는 응해야하는 입장이었기에, 포격 도발에 대처하는 박근혜 정부의 전략은 ‘화전양면전술’의 모습을 띠었다. 박 대통령은 회담이 진행 중이던 와중에 “도발 행위에 대한 사과나 재발방지가 없다면 정부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고 확성기 방송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중동과 종편 등 보수언론은 북한이 군사적 위협을 가하면서 한편으로는 대화를 요구하는 ‘화전양면전술’을 쓰고 있다고 비난했는데, 사실 한국 정부도 같은 전술을 쓰고 있었던 셈이다. 김종대 디펜스21 편집장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적대상태에 있는 두 국가가 담판을 하는 중에 이런 화전양면 전술을 쓰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나? 그건 국가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지적했다.
2.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대북원칙론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나아가 이번 사건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북원칙론’을 고수하는 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가동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북한이 비핵화를 하지 않는 이상 한 발도 나갈 수 없는 것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였다. 그 결과 박근혜 정부 2년 반 동안 남북관계는 꽉 막혀 있었다.
박 대통령은 2015년 신년기자회견에서 “대화를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진정성 있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며 “비핵화가 전혀 해결이 안 되는데 평화통일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원칙에 따르면 지뢰도발도 모자라 포격도발까지 감행한 북한과 대화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원칙론을 고수하지 않고 북한과 대화에 나선 결과 남북관계는 진전을 맞게 됐다. 남북 공동합의문 6항은 다양한 분야의 민간교류를 활성화한다는 내용이다. 5.24 조치 해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 지난 21일 오전 북한 포격으로 인한 긴급 대피령으로 경기도 연천군 중면 면사무소 방공호에 대피 중인 주민이 방송을 보고 있다. ⓒ민중의소리 | ||
5.24 조치 해제를 위한 사전 포석도 공동합의문에 들어있다. 공동합의문 5항는 추석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하고, 이를 위한 적십자 실무접촉을 9월 초에 가진다는 내용이다. 1항는 남과 북이 빠른 시일 내에 당국자 회담을 서울 또는 평양에서 개최하고, 여러 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진행해 나간다는 내용이다. 남북 간 접촉을 늘리고 이산가족 상봉 등의 계기를 만들면 5.24 조치 해제까지 쉽게 나아갈 수 있다.
3. 확성기로 드러난 방송의 위력
남북 공동합의문 3항은 남측이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모든 확성기 방송을 8월 25일 12시부터 중단하기로 한다는 내용이다. 한국군의 대북확성기 방송은 중단됐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북방송이 더 활성화될 가능성도 있다.
포격도발과 고위급 회담 과정에서 확성기의 효력이 대단하다는 내용의 언론보도가 쏟아졌다. 뉴시스는 회담 직후 쓴 기사 <북 ‘유감’ 이끌어낸 대북방송…‘천군만마’도 부럽지 않아>에서 “대북확성기 방송이 매우 효과적인 공격 수단이었음이 입증됐다”며 “이 같은 대북방송에 북한군들이 상당히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대북방송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미 나오고 있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24일 북한 주민들을 상대로 한 민간 방송사업자에게 주파수를 배정하고 프로그램 제작비를 지원하도록 하며 이들 방송에 지상파 방송 재송신을 허용하고 방송통신발전기금을 지원하는 내용의 ‘방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하 의원은 새누리당 초·재선 의원모임인 ‘아침소리’ 회의에서 “이번 대북 확성기 방송에 북한이 깜짝 놀란 것처럼 북한은 대북방송에 굉장히 취약하고, 매우 아파하는 부분”이라며 “민간단체들이 10여년 째 방송하고 있지만 국내 주파수, 해외 주파수를 임대해서 어렵게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을동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지난 2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북한 주민이 우리 방송을 수신할 수 있도록 방송통신발전기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할 예정”이라며 “국가 안보와 존립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하는 우리 새누리당이 방송법과 방송통신발전기본법개정안을 당 차원에서 적극 지원해주시길 바라겠다”고 밝혔다. 북한이 이러한 움직임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경우 남북관계의 새로운 쟁점이 될 수 있다.
▲ TV조선 뉴스 갈무리 | ||
4. 군보다 더 흥분한 언론
이번 사건에서 몇몇 언론은 군보다 더 흥분했다. 북한의 포격 도발 이후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원점 타격’ ‘철저한 응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조선일보는 “이번만큼은 북에 끌려 다니는 악순환을 끝내겠다고 결심하고 불편과 희생을 각오한다면 북의 도발습성은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세계일보는 “한 발의 포탄이 떨어져도 원점을 초토화한다는 각오로 응징 태세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TV조선은 더 강하게 나갔다. TV조선에 출연한 패널들은 “응징은 1대 10으로 해야 한다” “응징에는 반드시 원점타격이 포함된다” “평화는 싸워서 지키는 것이지 굴복해서 얻는 게 아니다” “우리 영토로 날아오는 것은 바로 불을 뿜어야 한다” 등 전쟁불사론에 가까운 발언들을 쏟아냈다.
북한군은 대북 확성기를 끄라고 하면서 확성기가 아니라 야산에 포탄을 쐈다. 한국군도 원점을 타격하는 대신 DMZ 내 북측 지역을 타격했다. 남북 양측이 긴장을 고조시키지 않으려 노력한 셈이다.
언론보도는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전쟁선동에 가까운 몇 몇 언론의 보도는 북한에 무조건 강경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5. 안보위기가 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주식시장에서 오랜만에 ‘북한 리스크’란 말이 등장했다. 그간 남북 간 갈등이 심화되면 주가가 요동친다는 말은 ‘철 지난 이야기’였다. 한반도 위기가 상시적이라는 점을 경험으로 체득한 투자자들이 북한 변수에 동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포격 사고는 주식시장이 북한 리스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가설을 깨뜨렸다.
과거 1차, 2차 연평해전과 천안함, 연평도 포격에도 주가는 폭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의 포격 직후 8월 20일 주가가 폭락했다. 중국의 경기둔화, 미국의 금리 인상 움직임과 겹치면서 북한 리스크는 주식시장을 흔드는 ‘증폭제’ 역할을 했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북한 변수를 관리하지 못하면 경제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안 좋은 경제상황에서 북한의 위기는 경제침체의 증폭제 노릇을 할 수 있다. 이는 박근혜 정부의 지지층인 보수층도 반기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 22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남측 대표인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홍용표 통일부 장관과 북측 대표인 황병서 총정치국장, 김양건 노동당 비서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민중의소리 | ||
6. 남북관계, 정상회담으로 풀 수 있다.
이번 고위급 회담은 2+2 형식으로 진행됐다. 한국 측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홍용표 통일부 장관, 북측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과 김양건 노동당 대남 비서가 대표로 나섰다. 형식은 2+2지만 사실상 ‘대리 정상회담’에 가까웠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제1비서는 회담 상황을 CC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회담장에 설치된 CCTV는 회담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송했다. 청와대의 경우 위기관리상황실을 통해 내용을 확인하면서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북측도 실시간 확인 및 지시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회담이 무박 4일에 걸쳐 장기간 진행되고, 고비마다 정회가 거듭된 것도 양 정상의 직접 지시를 받고 있어 재량권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박근혜 정부 2년 간 남북 정상회담이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됐다. 그간의 정상회담 주장은 “다른 게 안 되니까 정상회담이라도 해보자”는 취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2+2 대리회담을 계기로 고위급 접촉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정상회담까지 도달할 수 있다. 남북 정상이 직접 관여하자 회담이 중간에 깨지지 않고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점도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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